사막 한가운데서 ‘유령 탄소사업’…유럽, ‘짝퉁’ 中 배출권에 놀아나

해외

이데일리,

2026년 5월 25일, 오후 06:12

[이데일리 방성훈 기자] 유럽 최소 9개국 기업들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거나 조작된 정황이 짙은 중국 탄소 감축 사업에서 ‘탄소배출권’(크레딧)을 대거 사들인 것으로 드러났다. 유럽 각국 정부가 운영하는 제도임에도 허술한 검증 탓에 허위 사업에 농락당한 것으로, 탄소 시장의 신뢰성에 근본적인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25일(현지시간)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유럽 9개국 기업들은 2020년부터 2024년에 걸쳐 중국 내 여러 탄소 감축 사업에서 배출권을 사들였으나, 사기를 당한 것으로 뒤늦게 확인됐다. 탄소배출권은 온실가스를 줄인 만큼 발급받아 사고팔 수 있는 권리로, 기업들은 이를 사들여 자사의 배출 규제 기준을 맞춘다.

피해 규모도 상당하다. 독일에서만 무효 처리된 배출권이 210만톤에 달하고, 다른 8개국에 팔린 배출권도 최소 50만톤으로 추정된다. 이들 사업 상당수는 블룸버그와 자체 분석기관 블룸버그NEF(BNEF) 기자들의 현장 방문과 드론·위성 영상 분석 결과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진=AFP)
◇등록된 사업장 직접 찾아가보니…사막 빈터에 빈 아파트

문제가 된 제도는 유럽연합(EU)이 2015년 도입한 ‘업스트림 배출 감축’(UER) 시장이다. 원유·가스를 캐내는 상류(업스트림) 단계에서 새어나오는 오염물질을 줄이는 사업에 배출권을 주는 제도로, 배출권 1개는 이산화탄소(CO2) 1톤 감축으로 인정된다. 약 180개 사업이 등록됐는데 대부분 중국에 있었고, 2022년 EU 15개 회원국이 590만톤어치를 사들였다. 기업들로선 온실가스 규제를 맞추는 가장 값싼 수단이었다. 사업자가 감축 계획을 내면 제3자 감사기관이 현장을 검증하고 당국 승인을 거쳐 배출권을 파는 구조지만, 블룸버그가 직접 현지를 찾아가 보니 이 검증은 헛돌고 있었다.

대표적인 곳이 중국 중부 황토고원의 창칭 유전이다. 이 일대 사업들은 이산화탄소 약 12만톤 감축을 내세워 2021년 룩셈부르크, 2023년 오스트리아·폴란드 당국에 등록됐다. 하지만 지난해 11월 기자들이 등록 문서에 적힌 좌표를 찾아가자 사업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한 좌표는 인근 소도시의 평범한 사무용 건물로, 또 다른 좌표는 모래사막의 빈터로 이어졌다. 차로 5분 거리에 원유·액화석유가스 저장탱크를 갖춘 대형 처리시설이 있긴 했지만, BNEF 분석 결과 가스를 회수하는 설비가 아니라 단순히 액체를 처리하는 시설이었다. 등록상 개발사는 섬서성 소재 ‘LY석유가스기술서비스’였지만, 회사가 적어낸 베이징 주소는 주거 단지의 한 아파트로 확인됐다.

중국 동부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성리 유전의 한 사업은 2020~2022년 영국·오스트리아·폴란드 기업에 배출권을 팔았다. 감사기관 뮐러-BBM의 보고서는 이 시설이 “원래라면 그냥 태워버렸을 가스를 포집한다”고 명시했지만, 기자들이 산둥성 둥잉의 현장을 찾았을 때 가스 포집 설비는 없었다. 석유를 퍼올리는 펌프와, 가스를 포집하기는커녕 그대로 태워버리는 소각탑만 있었다.

◇감독해야 할 감사가 개발자였다…‘셀프 인증’의 덫

검증 시스템의 허점은 ‘개발자가 곧 감사’라는 이해충돌로 이어졌다. 왕징(영문명 로빈 왕)이라는 인물은 2020년 한 해 동안 감사기관 베리코 소속 감사로 일하는 동시에, UER 사업을 개발하는 중국 컨설팅사 ‘베이징 카본’의 매니저로도 일했다. 사업을 만드는 쪽과 그 사업을 검증하는 쪽에 동시에 발을 걸친 셈이다. 그는 2020~2024년 베이징 카본이 개발한 20개 넘는 사업을 직접 감사했고, 이들 사업은 독일에 배출권을 팔았다. 베이징 카본은 자사가 소유하지도 않은 중국 부지에 최소 5개 사업을 등록한 사실이 2024년 중국 매체 차이신 보도로 드러나기도 했다. 앞서 사막 빈터로 이어졌던 창칭 사업 좌표 역시 감사기관이 2021~2022년 방문했다고 한 곳이지만 위성사진엔 빈 모래땅뿐이었고, 책임 감사는 다름 아닌 왕씨였다.

(사진=AFP)
◇가짜 배출권 구매해도 제재 없어…구멍 뚫린 탄소시장

배출권을 사들인 기업 명단에는 BP와 셸, 토탈에너지, 엑손모빌, 프랑스전력공사(EDF), 오스트리아 OMV, 헝가리 몰그룹 등 주요 에너지 기업이 줄줄이 올랐다. 다만 이들은 배출권을 ‘선의로’ 구매했다는 이유로 제재를 받지 않는다. 독일 관세청은 “기업들은 제도를 설계된 대로 이용했을 뿐”이라고 밝혔다.

파장은 컸다. 독일에서는 2년여 전 중국산 배출권 스캔들이 처음 터졌고, 당국은 45개 사업을 “의심스럽거나” 환경 효과를 부풀렸거나 가짜라고 판정했다. 이 가운데 3분의 2가 발급한 배출권을 취소했는데, 무효 처리된 30개 사업이 주장한 감축량만 210만톤에 달한다. 그러나 사업을 벌인 기업·개인은 법적 처벌을 받지 않을 공산이 크다. 독일 법상 기업 자체를 형사 기소할 수 없는 데다, 사업을 승인한 검증기관 직원 17명에 대한 사기 수사도 증거 부족으로 올해 1월 종결됐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운영하는 제도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점을 특히 심각하게 본다. 유엔(UN) 탄소 배출권 자문을 지낸 위르크 퓌슬러 인프라스 대표는 “완전히 조작된 사업은 사실상 들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EU가 2040년까지 1990년 대비 온실가스 배출량을 90% 줄이겠다는 목표를 추진하면서 ‘고품질 국제 배출권’을 제한적으로 활용할 방침이어서 우려는 더 크다. 환경단체 ‘교통과 환경’(T&E)의 페데리코 테레니는 “엄격한 안전장치가 없으면 유럽의 기후 노력은 종이호랑이가 될 위험이 있다”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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