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경계 허무는 중국식 빅블러[왓츠 인 차이나]

해외

이데일리,

2026년 6월 01일, 오전 05:00

[최여진 맥스밸류 캐피털 최고경영자(CEO)] 4월 중순 중국 해관총서가 발표한 1분기 무역 통계는 두 가지 얼굴을 보여준다. 수출입 총액 11조8400억 위안(약 2617조 8240억원). 사상 처음으로 같은 기간 11조 위안을 넘어선 ‘규모의 승리’가 한쪽이라면 다른 한쪽에는 더 흥미로운 그림이 있다. 전기차 수출 77.5%, 배터리 50.4%, 풍력발전기와 부품 45.2% 증가. 세 품목은 흔히 ‘녹색 제품’으로 묶이지만 본질을 들여다보면 모두 단일 산업의 산물이 아니다. 자동차는 소프트웨어를 품었고 배터리는 에너지 산업이 됐으며 풍력 설비는 제조업을 넘어 전력 인프라가 됐다. 산업과 산업, 제조와 서비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경계가 통계표 위에서 이미 흐려지고 있다. 미·중 디커플링과 관세 압력이 거세지는 가운데 중국은 시장과 산업 양쪽을 동시에 재구성하고 있다. 중국식 ‘빅블러’(Big Blur·산업 간 경계 붕괴)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최여진 맥스캐피탈 CEO
이 흐름은 기업의 행보에서 더 선명하다. 비야디(BYD)는 배터리 회사로 출발해 세계적 전기차 업체로 성장했고 이제는 에너지저장장치와 도시 철도 시스템까지 영역을 넓혔다. DJI는 드론 제조사를 넘어 농업·물류·측량·재난 대응 솔루션으로 확장하고 있다. 통신장비로 출발한 화웨이는 미국의 강도 높은 제재 속에서 스마트카 정보통신기술(ICT) 솔루션, 클라우드, 자체 운영체제(HarmonyOS), AI 칩으로 사업을 다각화했다. 통신·자동차·반도체·소프트웨어가 한 기업 안에서 맞물린다. ‘제품 기업’으로 불리던 회사들이 여러 산업을 가로지르는 ‘플랫폼·인프라 기업’으로 재탄생하고 있다. 무엇을 만드는가가 아니라 무엇과 무엇을 잇는가가 그 회사의 정체성을 나타내도록 바뀌고 있는 것이다.

경쟁의 방식도 달라졌다. 과거에는 같은 업종 안에서 점유율을 다퉜다면 이제는 다른 업종의 기능을 흡수하며 경쟁의 좌표 자체를 옮긴다. 샤오미는 더는 자신들을 스마트폰 회사라고 부르지 않는다. ‘사람·자동차·집을 잇는 통합 생태계’(스마트폰(人), 자동차(車), 스마트홈(家)을 하나의 운영체제(OS)로 묶어 끊김 없이 연결하는 커넥티드 생태계)를 자처한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경쟁 상대를 삼성·애플에서 테슬라·구글·가전 메이커로까지 넓혔다. 우리가 여전히 ‘전자회사’, ‘자동차회사’라는 이름표로 기업을 규정하는 동안 세계 시장의 경쟁 지도는 이미 다시 그려지고 있다.

협력의 문법도 함께 바뀌고 있다. 바깥에서는 미국의 관세와 기술 제재가 거세지고 안에서는 중국 정부가 산업 자립과 공급망 결속을 강하게 밀어붙인다. 중국 기업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더 단단히 뭉치고 있다. 경쟁사와 치열하게 싸우면서도 공급망과 표준 영역에서는 손을 잡는 합종연횡이 일상화했다. 비야디가 DJI와 손잡고 차량 탑재 드론 시스템을 선보인 것처럼 과거라면 만나지 않았을 업종 간 연합도 늘고 있다. 같은 회사가 어떤 사업에서는 경쟁자고 다른 사업에서는 동맹인 시대, 산업 지도는 단선이 아니라 그물망으로 다시 재편하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은 이 그물망 위 어디에 서 있는가. 한국에서도 빅블러는 이미 시작됐다. 현대차는 자동차를 넘어 로봇과 수소, 미래 모빌리티로 확장하고 있고 삼성전자 역시 전자를 넘어 AI·헬스케어·스마트홈 생태계를 넓혀간다. 한국이 오랜 시간 쌓아온 제조 완성도와 글로벌 브랜드 신뢰는 분명한 자산이다. 그러나 한국 역시 미·중 압력 속에서 산업 재편을 요구받고 있다. 다만 중국식 빅블러가 국가 주도의 강한 드라이브 위에서 움직인다면 한국은 시장과 기업의 자율적 전환 역량에 더 크게 기댈 수밖에 없다. 산업 간 경계를 넘나드는 협업과 전환이 자유로워야 하고 새로운 시도의 실패를 과도하게 낙인찍지 않는 분위기도 절실하다.

네거티브 규제냐 포지티브 규제냐를 둘러싼 익숙한 규제 논쟁만으로는 지금의 융합 속도를 따라잡기 어렵다. 산업을 나누는 기준 자체가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빅블러 시대의 승부는 누가 더 큰 회사인가가 아니라 누가 더 빨리 다른 회사로 진화하느냐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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