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세계, 깊은 영적·문화적 위기"…스페인 의회서 경종

해외

이데일리,

2026년 6월 09일, 오전 10:59

[이데일리 성주원 기자] 교황 레오 14세가 스페인 의회 연설에서 이민자 보호와 군비 축소를 촉구하며 세계가 심각한 위기에 처했다고 경고했다.

교황 레오 14세가 8일(현지시간) 스페인 마드리드 하원에서 스페인 의회 의원들과 만나 연설하고 있다. (사진=AP)
8일(현지시간)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교황 레오 14세는 이날 스페인 의회에서 “세계는 깊은 영적·문화적 위기를 겪고 있다”며 각국 정치인들에게 전쟁 종식과 이민자 보호를 촉구했다. 이날 연설은 이스라엘과 이란이 2개월간의 휴전 이후 가장 심각한 충돌을 재개한 날 이뤄져 더욱 주목받았다.

교황의 스페인 의회 연설은 이번이 처음이다. 스페인어로 진행된 이날 연설은 의원들의 7분간 기립 박수를 이끌어냈다.

◇“무기는 침묵을 강요할 뿐…진정한 평화 못 만든다”

교황은 폭력, 양극화, 상호 불신 등 다양한 형태로 표출되고 있는 세계의 위기를 직접적으로 거론하며 “무기는 일시적인 침묵을 강요할 수 있지만, 결코 진정하고 지속적인 평화를 만들어 낼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유럽의 군비 지출 증가를 “우려스럽다”고 규정했다. 지난해 유럽 국방비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압박 속에 냉전 종식 이후 가장 큰 폭으로 늘었다. 교황은 지난달에도 유럽의 재무장을 “외교에 대한 배신”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 지난달 각국 정부에 인공지능(AI) 개발 속도를 늦출 것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던 교황은 이날도 AI의 군사적 활용에 대해 엄격한 윤리적 감시가 필요하다고 재차 강조했다.

페드로 산체스 스페인 총리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회원국 국방비를 국내총생산(GDP)의 5%로 높이라는 트럼프 대통령의 요구를 거부해왔다. 다만 산체스 총리 재임 중 스페인 국방비는 2018년 약 100억 유로(약 17조6200억원)에서 현재 340억 유로(약 59조9080억원) 이상으로 3배 이상 증가했다.

◇이민자 보호 “국제 질서의 윤리적 토대”

교황은 이번 스페인 방문에서 이민 문제에 특히 집중했다. 그는 이민자 지원 부재가 ‘국제 질서의 윤리적 토대’를 위협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전쟁·빈곤·기후변화 등 이주의 근본 원인을 해결할 것을 촉구했다.

스페인 방문 마지막 일정으로 교황은 위험한 대서양 항로를 건너온 이민자들이 대거 도착하는 카나리아 제도를 찾을 예정이다. 비정부기구(NGO) 단체 카미난도 프론테라스에 따르면 2025년 카나리아 제도로의 이주를 시도하다 숨진 이민자는 3000명을 넘는다.

산체스 정부는 약 50만명의 이민자가 합법적 체류 신분을 신청할 수 있는 대규모 사면 프로그램을 시행 중이다.

◇성직자 학대 피해자 면담…“배상 제공해야”

교황은 또 이날 성직자에 의한 성적 학대 피해자 6명과 1시간 동안 면담하고, 가톨릭 주교들에게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배상을 제공해야 한다고 말했다. 스페인 인권 옴부즈맨의 2023년 보고서에 따르면 수십년에 걸쳐 수십만명이 스페인 내 성직자로부터 학대를 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일부 피해자는 면담에서 자신들이 배제됐다며 교회의 대응이 여전히 불충분하다고 반발했다.

교황은 고해성사(신자가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는 가톨릭 성사)의 비밀 보호도 옹호했다. 프랑스 등 일부 국가에서는 사제가 고해성사 중 접한 성적 학대 정보를 당국에 신고하도록 의무화하는 방안을 논의해왔는데, 교황은 이에 대해 비밀 보호가 “신자가 하나님 앞에 영혼을 열 수 있는 신성한 내면의 자유 공간을 보존한다”고 반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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