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주제가에 한국어가…'美 문화패권' 저물고 K콘텐츠 약진

해외

이데일리,

2026년 6월 12일, 오후 05:08

[이데일리 방성훈 기자] 미국이 한 세기 가까이 거머쥐었던 ‘글로벌 대중문화’ 패권이 저물고 있다. 이번 북중미 월드컵만 봐도 전 세계 인구 절반이 ‘똑같이’ 세계 최대 스포츠 이벤트를 지켜보고 있지만, 정작 전 세계가 ‘같은 것’을 즐기는 시대는 막을 내리고 있다는 분석이다. 음악·드라마·게임 할 것 없이 사람들이 미국 콘텐츠를 떠나 자국·지역 콘텐츠로 빠르게 돌아서고 있어서다. 이 과정에서 전 세계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한국 콘텐츠의 약진이 두드러진다는 평가다.

한국계 미국인 싱어송라이터 이재(EJAE)가 11일(현지시간) 멕시코시티에서 열린 2026 월드컵 개막식 무대에서 공연하고 있다. (사진=AFP)
이코노미스트는 11일(현지시간) 이날 개막한 북중미 월드컵 주제가가 영어·프랑스어·스페인어·이탈리아어 등 여러 언어로 ‘세계는 하나’를 외치지만, 전 세계가 동시에 지켜보는 월드컵에서조차 ‘단일문화’ 이벤트는 이제 예외가 됐다고 평가했다.

이번 월드컵에선 개막식부터 사상 처음 도입되는 결승전 하프타임 쇼까지 수많은 글로벌 아티스트가 무대에 오른다. 겉으로만 보면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그 어느 때보다 세계화됐고, 그 중심에는 여전히 미국이 있는 것처럼 비친다.

하지만 이코노미스트는 “글로벌 스트리밍 플랫폼이 퍼질수록 사람들은 오히려 미국 콘텐츠에서 멀어지고 자국·인근 지역 콘텐츠로 향하고 있다”며 “세계가 더 연결될수록 더 ‘지역적인’ 즐길거리를 택하는 역설”이라고 지적했다.

◇음악·드라마, 자국 콘텐츠로 회귀

가장 뚜렷한 변화는 음악이다. 덴마크에서는 작년 스트리밍 상위 10곡 중 9곡이 덴마크 가수의 덴마크어 노래였다. 2019년만 해도 상위 20곡 중 덴마크어 곡은 5곡뿐이었지만 지난해 18곡으로 늘었다. 스웨덴은 상위 20곡 중 스웨덴어 비중이 같은 기간 29%에서 55%로, 노르웨이는 13%에서 38%로 뛰었다. 브라질에서는 이달 첫째 주 유튜브뮤직 상위 100명 중 96명이 자국 가수였다. 스포티파이 글로벌 톱50에 오른 곡의 언어도 2020년의 두 배가 넘는 16개로 늘었다.

배경에는 기술 변화가 있다. 과거 CD 시대에는 인기 가수를 세계적 스타로 키우는 ‘규모의 경제’가 작동했지만, 이제는 제작·유통 비용이 싸져 ‘덴마크 힙합’ 같은 작은 틈새도 수익을 낸다. 음반 판매가 줄고 라이브 공연이 주 수입원이 되면서, 세계를 도는 것보다 자국에서 공연하는 편이 더 이득이라는 점도 지역화를 부추겼다.

TV도 마찬가지다. 넷플릭스는 초기에 ‘마르코 폴로’ ‘센스8’ 등 전 세계를 겨냥한 작품을 만들었다가 재미를 보지 못한 뒤, 철저히 현지 취향에 맞춘 작품으로 방향을 틀었다. 17세기 폴란드를 배경으로 한 코미디 ‘1670’, 노르웨이 괴물 이야기 ‘트롤’이 현지에서 흥행했다. 지난해 넷플릭스는 사상 처음으로 영어 작품보다 비영어 작품을 더 많이 제작했다.

역설적이게도 세계적 히트의 비결은 ‘진짜 그 나라다움’이라는 게 넷플릭스의 결론이다. 래리 탠즈 넷플릭스 유럽·중동·아프리카 콘텐츠 책임자는 “자국에서 먼저 뜨겁게 인기를 끌지 못한 작품이 글로벌 히트가 된 적은 없다”고 말했다. 그 결과 글로벌 TV 시리즈 수요에서 미국 작품이 차지하는 비중은 2022년 51%에서 지난해 42%로 떨어졌다.

지난해 7월 3일 덴마크 로스킬레 페스티벌에서 팬들이 환호하고 있는 모습. (사진=AFP)
◇K콘텐츠, 월드컵 무대까지 점령

이 같은 흐름에서 한국은 ‘자국 콘텐츠 강국’의 대표 사례로 꼽힌다. 데이터 분석기업 디지털아이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과 일본에서 넷플릭스 최다 시청작 10편 중 9편이 자국 작품이었다.

음악에서도 한국의 존재감은 이번 월드컵에서 그대로 확인된다. 대회 공식 주제가 ‘DNA’에는 한국계 싱어송라이터 이재(EJAE)가 안드레아 보첼리, 데이비드 게타 등과 함께 참여해 한국어 가사를 직접 썼다. 개막 전야제 무대에는 블랙핑크 리사가 올랐고, 7월 19일 결승전에서 사상 처음 도입되는 하프타임 쇼에는 방탄소년단(BTS)이 마돈나·샤키라와 함께 공동 헤드라이너로 선다. K팝이 대회 처음부터 끝까지 무대를 누비는 셈이다.

게임에서도 한국은 세계 5대 시장 중 하나로 꼽힌다. 콘솔·PC 게임은 ‘포트나이트’ ‘로블록스’ 등으로 나라별 차이가 크지 않지만, 이용자가 훨씬 많은 모바일에서는 지역색이 뚜렷하다. 미국·중국·일본·영국·한국 등 5대 시장의 상위 10개 게임에 공통으로 든 게임은 단 하나도 없었다. 인도 순위권에는 현지 전통 보드게임을 기반으로 한 게임이 오르기도 했다.

지난해 6월 28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넷플릭스 한국 드라마 ‘오징어 게임 시즌3’ 공개를 기념하는 퍼레이드가 열리고 있다. (사진=AFP)
◇플랫폼은 美 차지지만…콘텐츠 패권은 분산

콘텐츠가 지역으로 쪼개지는 흐름은 시청 방식의 변화와도 맞물린다. 콘텐츠 발견을 인간이 아닌 알고리즘이 주도하면서, 사람들의 취향이 전문가들의 예상보다 훨씬 지역적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실제로 유튜브에서 ‘인기 급상승’에 오른 영상의 4분의 3은 단 한 나라에서만 인기를 끌었다. 진정한 의미의 ‘글로벌 히트’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게임 시장에서는 중국 기업들이 빠르게 점유율을 늘렸지만 시장 장악이 ‘중국 문화’ 전파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해외에서 성공한 중국 게임들이 오히려 중세 유럽풍이나 미국풍으로 현지화됐기 때문이다. 시장은 얻었지만 문화 영향력, 즉 소프트파워로는 이어지지 못한 셈이다.

이는 미국이 처한 상황과도 일맥상통한다. 이코노미스트는 미국의 한 세기에 걸친 대중문화 지배가 끝났다고 봤다. 미국은 유튜브와 앱스토어 등 유통 플랫폼을 여전히 장악해 산업 수익의 상당 부분을 가져간다. 그러나 콘텐츠 장악력은 잃었고, 그와 함께 미국적 가치를 전 세계에 심던 ‘문화적 견인력’도 잃었다는 것이다.

이코노미스트는 “미국은 이제 막 시작된 새로운 소프트파워 게임에서 저물어가는 세력”이라며 “그 빈자리는 음악의 브라질, 드라마의 한국, 게임의 중국이 메우고 있다”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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