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런 그린스펀 전 연준 의장 별세…19년간 세계 경제 지휘한 '마에스트로'

해외

이데일리,

2026년 6월 22일, 오후 11:25

[뉴욕=이데일리 김상윤 특파원] 1980~2000년대 미국 경제를 상징했던 앨런 그린스펀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이 22일(현지시간) 별세했다. 향년 100세.

앨런 그린스펀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이 1990년 7월 18일(현지시간) 워싱턴 상원 은행·주택·도시문제위원회 청문회에서 증언하고 있다. 1987년부터 2006년까지 연준을 이끌며 미국의 장기 경제호황을 주도했던 그린스펀 전 의장은 22일 파킨슨병 합병증으로 별세했다. 향년 100세. (사진=AFP)
‘마에스트로(Maestro)’, ‘오라클(Oracle)’로 불리며 세계 금융시장을 움직인 인물로 평가받았던 그는 19년에 가까운 재임 기간 미국 역사상 최장기 경기 확장을 이끌며 중앙은행의 위상을 끌어올렸다. 그러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에는 금융시장 규제 완화와 저금리 정책이 위기의 토대를 마련했다는 비판도 함께 받았다.

미국 CNBC와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그린스펀 전 의장은 이날 자택에서 파킨슨병 합병증으로 숨졌다. 부인인 NBC뉴스의 안드레아 미첼 수석 워싱턴·외교 특파원이 사망 사실을 확인했다.

미첼은 성명을 통해 “그는 양당 대통령 아래에서 수십 년 동안 미국 경제를 형성한 거인이었다”며 “항상 자신의 실수를 솔직하게 인정했던 인물”이라고 밝혔다.

연준도 성명을 내고 “그린스펀의 통화정책과 경제사상에 대한 기여는 연준과 경제학계, 미국에 지속적인 흔적을 남겼다”며 애도의 뜻을 전했다.

그린스펀은 1926년 뉴욕 맨해튼 북부 워싱턴하이츠에서 태어났다. 증권 중개인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경제와 금융에 관심을 가졌고, 한때 클라리넷과 색소폰 연주자로 재즈 밴드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이후 뉴욕대(NYU)에서 경제학을 공부했고 경제 컨설팅 회사를 설립해 명성을 쌓았다. 자유시장주의 철학자 아인 랜드와의 교류는 그의 경제관 형성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정치권과의 인연도 일찍 시작됐다.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의 경제정책 자문을 맡았고, 제럴드 포드 행정부에서는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CEA) 위원장을 지냈다. 이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1987년 그를 Fed 의장으로 발탁하면서 본격적으로 세계 금융시장의 중심에 섰다.

그린스펀의 Fed 의장 취임은 전설적인 인플레이션 퇴치자 폴 볼커 전 의장의 뒤를 잇는 자리였다. 당시만 해도 그가 볼커의 업적을 이어갈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취임 두 달 만에 찾아온 1987년 ‘블랙 먼데이’ 주가 폭락 사태를 성공적으로 수습하며 시장의 신뢰를 얻었다. 다우존스30산업평균지수가 하루 만에 22.6% 폭락하자 Fed가 금융 시스템에 충분한 유동성을 공급할 준비가 돼 있다고 선언했고, 시장은 빠르게 안정을 되찾았다.

이후 그는 1990년대 미국 경제 호황기를 이끈 주역으로 자리 잡았다. 특히 정보기술(IT) 혁명이 생산성을 높이고 있다는 점을 다른 정책 결정자들보다 먼저 파악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당시 다수 경제학자는 경기 과열을 우려하며 금리 인상을 요구했지만, 그린스펀은 기술 발전이 경제의 잠재성장률을 높이고 있다고 판단해 경기 확장을 허용했다.

결과적으로 미국 경제는 1991년 경기침체 종료 이후 2001년까지 10년간 확장 국면을 이어갔다. 이는 당시 기준 미국 역사상 최장 경기 확장이었다. 이 기간 S&P500 지수는 약 4배 상승했고 경제성장률은 연평균 3.5%를 기록했다. 실업률은 2000년 4월 3.8%까지 떨어져 1969년 이후 최저 수준을 기록했다.

그린스펀은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 1998년 러시아 모라토리엄(채무불이행), 헤지펀드 롱텀캐피털매니지먼트(LTCM) 위기, 2001년 9·11 테러, 닷컴 버블 붕괴 등 연이은 충격 속에서도 미국 경제를 안정적으로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를 상징하는 표현은 1996년 12월 연설에서 나온 ‘비이성적 과열(Irrational Exuberance)’이다. 그는 “비이성적 과열이 자산 가치를 지나치게 끌어올리고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느냐”고 말하며 자산시장 거품 가능성을 경고했다. 당시 세계 증시는 일시적으로 흔들렸지만 기술주 중심의 상승장은 이후에도 수년간 지속됐다. 닷컴 버블 붕괴 이후 이 표현은 금융시장 역사에 남는 명언이 됐다.

시장 참가자들은 그의 발언 하나하나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는 의회 청문회와 공개 연설에서 복잡하고 난해한 표현을 자주 사용했는데, 투자자와 기자들은 그 속에서 정책 신호를 찾아내기 위해 애썼다. 워싱턴포스트는 1997년 “대통령 다음으로 가장 강력한 인물”이라며 “몇 마디 말만으로도 주식시장을 천국이나 지옥으로 보낼 수 있다”고 평가했다.

그린스펀은 은퇴 후 “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받으면 점점 더 모호한 문장을 이어갔다”며 “질문자는 답변을 들었다고 생각하고 넘어갔다”고 회고했다. 이후 ‘연준 화법(Fedspeak)’이라는 표현은 사실상 그를 상징하는 용어가 됐다.

그는 또 오늘날 연준의 정책 소통 방식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남겼다. 재임 중인 1994년부터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가 회의 직후 정책 결정을 공개하도록 했고, 결정 배경도 함께 설명하는 체계를 도입했다. 이는 현재 연준의 투명성 강화 정책의 출발점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그의 유산은 금융위기 이후 크게 재평가됐다. 주택 가격이 급등하던 2000년대 중반 그는 주택시장 과열을 심각한 위협으로 보지 않았다. 당시 연준 내부에서는 이미 주택 버블 가능성이 논의되고 있었지만 그는 “거품이 있다면 제한적인 수준”이라고 판단했다.

이후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이 금융 시스템 전반으로 확산되면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하자 비판의 화살은 그린스펀을 향했다. 금융기관의 자율 규제를 신뢰하며 규제 강화를 반대했던 그의 자유시장주의 철학이 위기의 원인 중 하나라는 지적이 쏟아졌다.

그는 결국 의회 증언에서 “규제당국은 실패했다”고 인정했고, “금융기관들이 스스로 위험을 통제할 것이라고 믿었던 나 자신을 포함한 많은 사람이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또 금융위기 원인에 대한 자신의 판단을 두고 “70%는 옳았지만 30%는 틀렸다”고 평가했다.

미국 금융위기 조사위원회는 최종 보고서에서 그린스펀 등이 주도한 수십 년간의 규제 완화가 금융위기를 막을 수 있는 안전장치를 제거했다고 지적했다. 아카데미상 수상 다큐멘터리 ‘인사이드 잡(Inside Job)’ 역시 그를 금융위기의 주요 책임자 중 한 명으로 묘사했다.

정치적으로는 공화당 성향이었지만 중앙은행 독립성 문제에서는 단호한 태도를 유지했다. 그는 2019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연준 비판에 대해 “연준은 경제와 금융시장에 대해 대통령보다 훨씬 더 많이 알고 있다”고 반박했다. 올해 1월에는 제롬 파월 Fed 의장에 대한 형사 수사를 비판하는 전직 연준·재무부 고위 인사들의 공동성명에도 참여했다.

로저 퍼거슨 전 연준 부의장은 블룸버그에 “그린스펀은 20세기 후반 세계 최고의 중앙은행장 중 한 명으로 기억돼야 한다”며 “기술 발전이 생산성을 끌어올리고 있다는 점을 가장 먼저 인식한 정책 결정자 가운데 한 명이었다”고 평가했다.

한때 미국 경제의 상징으로 추앙받았고 이후 금융위기의 책임론 속에 혹독한 재평가를 받았지만, 그린스펀이 현대 중앙은행 역사에 남긴 영향력만큼은 부인하기 어렵다는 평가가 나온다. 그의 삶은 미국 경제의 황금기와 금융위기, 그리고 중앙은행의 역할을 둘러싼 논쟁을 모두 관통한 한 시대의 기록으로 남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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