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증권거래소(사진=AFP)
최근 증시는 미국과 이란 간 전면전 우려가 완화되고 AI 투자 확대 기대가 이어지면서 가파른 상승세를 이어왔다. S&P500지수는 중동 전쟁으로 인한 저점 대비 약 20% 가까이 반등하며 사상 최고치에 바짝 다가섰다. 하지만 이날 시장은 협상 진전이라는 긍정적인 재료보다 AI 관련주를 둘러싼 우려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했다.
◇美·이란 협상 진전에 유가 급락
이날 시장의 첫 번째 관심사는 스위스에서 진행된 미국과 이란의 평화협상이었다. 양국은 첫 고위급 회담에서 최종 평화협정 체결을 위한 60일 로드맵에 합의했다. 협상을 중재한 카타르와 파키스탄은 회담이 예상을 웃도는 진전을 이뤘다고 평가했다. 미국은 협상 분위기를 이어가기 위해 이란산 원유 판매를 60일간 허용하는 한시적 제재 면제 조치를 발표했다. 사실상 이란 경제에 숨통을 틔워주는 조치다.
JD 밴스 미국 부통령은 회담 직후 “매우 좋은 진전이 있었다”고 평가하며 이란이 국제원자력기구(IAEA) 핵사찰단의 복귀를 허용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란 측은 핵사찰 복귀 합의는 없었다며 즉각 반박했다. 레바논 교전 문제와 호르무즈 해협 통항 문제 역시 여전히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상태다. 그럼에도 시장은 양측이 대화를 이어가고 있다는 점 자체에 의미를 부여했다.
이에 따라 최근 중동 긴장 고조로 급등했던 국제유가는 큰 폭으로 하락했다. 브렌트유 8월물은 전 거래일보다 3.31% 하락한 배럴당 77.90달러에 마감했고, 서부텍사스산원유(WTI) 7월물은 2.32% 내린 배럴당 74.82달러에 거래를 마쳤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시장은 이란의 호르무즈 해협 봉쇄 가능성과 레바논 전선 확전 우려를 반영하며 유가를 배럴당 90달러 안팎까지 끌어올렸다. 그러나 평화협상 진전과 원유 공급 정상화 기대가 확산하면서 에너지 시장 분위기는 빠르게 바뀌고 있다.
월가에서는 유가 하락이 미국 소비자와 기업 모두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에너지 비용 부담이 줄어들 경우 소비 여력이 늘어나고 기업들의 비용 압박도 완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날 시장은 유가 하락의 긍정적 효과보다 연준의 통화정책과 AI 투자 수익성 문제에 더욱 주목했다.
유가 하락이라는 호재에도 기술주 매도세는 거셌다. 최근 뉴욕증시 상승을 주도해온 AI 관련 종목들에 대한 회의론이 다시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AI 인프라 구축을 위해 천문학적인 자금을 쏟아붓고 있는 빅테크 기업들의 투자 수익성이 향후 기대만큼 나타날 수 있을지를 둘러싼 논란이 다시 부각됐다.
알파벳은 이날 5.1% 급락하며 대형 기술주 하락을 주도했다. 최근 노벨 화학상 수상자인 존 점퍼와 AI 분야 핵심 인물인 노엄 셰이저가 경쟁 연구소로 이직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AI 경쟁력 약화 우려가 커졌다. 메타플랫폼스는 2.3%, 아마존은 4.8%, 마이크로소프트는 3.2% 각각 하락했다. AI 인프라 투자 경쟁을 주도하고 있는 이른바 ‘하이퍼스케일러’ 기업들이 일제히 약세를 보이면서 시장 전체를 끌어내렸다.
최근까지 투자자들은 AI 투자 확대를 성장의 상징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제는 투자 규모 자체보다 실제 수익 창출 여부에 관심을 돌리고 있다. 알파벳과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메타 등 주요 빅테크 기업들은 지난해 말 이후 AI 데이터센터와 서버 구축을 위해 3000억달러가 넘는 자금을 채권시장에서 조달했다. AI 인프라 경쟁이 본격화되면서 투자 규모는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지만, 그에 걸맞은 수익은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밀러 타박의 매트 말리 수석 시장전략가는 “현재 시장이 가장 우려하는 것은 하이퍼스케일러들의 투자수익률”이라며 “엄청난 규모의 자본이 투입되고 있지만 아직 이에 상응하는 수익이 나타나고 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그는 특히 기업들이 서로 투자하고 동시에 상대방의 서비스를 구매하는 ‘순환 투자(circular investment)’ 구조를 언급하며 “AI 생태계 내부에서 자금이 돌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실질적인 경제적 가치가 창출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다만 낙관론도 여전히 존재한다. US뱅크의 빌 노시 선임 투자책임자는 “AI 관련 종목은 투자심리에 따라 크게 움직이는 경향이 있지만 장기적으로 가장 강력한 펀더멘털을 가진 분야 역시 AI 데이터센터 구축 시장”이라며 “하이퍼스케일러뿐 아니라 반도체와 전력, 냉각장비 등 AI 인프라 생태계 전반이 수혜를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콜럼비아 스레드니들 인베스트먼트의 티파니 웨이드 역시 “AI 인프라 투자 증가 속도는 지난 2년보다 더 빠르다”며 “기술주 상승세는 앞으로 최소 몇 개 분기 더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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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시장에서 가장 눈길을 끈 종목은 스페이스X였다. 스페이스X는 16.4% 폭락하며 상장 이후 3거래일 연속 하락했다. 주가는 결국 상장 첫날 종가 아래로 떨어졌다. 최근 상장 이후 폭발적인 관심을 받았던 종목인 만큼 투자자들의 실망감도 컸다.
특히 회사가 사상 처음으로 투자등급 회사채 발행에 나선 것이 투자자들의 우려를 자극했다. 스페이스X는 지난 19일 기준 약 1008억달러 규모의 현금 및 현금성 자산을 보유하고 있다고 밝혔지만, 동시에 대규모 차입에 나서면서 AI 사업 확대를 위한 막대한 자금 수요를 드러냈다. 블룸버그는 스페이스X가 최소 200억달러 규모의 자금 조달을 추진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월가에서는 이를 AI 산업 전반의 과도한 투자 경쟁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로 보고 있다.
기술주 약세 속에서도 반도체 업종은 상대적으로 선방했다. 마이크론테크놀로지는 오는 24일 장 마감 후 발표될 실적에 대한 기대감으로 6.8% 급등했다. AMD는 2.7%, 인텔은 5.2% 각각 상승했다. 특히 마이크론 실적은 AI 랠리의 지속 여부를 판단할 중요한 시험대로 평가받고 있다. 마이크론 주가는 올해 들어서만 약 300% 상승한 상태다. 투자자들은 이번 실적을 통해 AI 서버용 메모리 수요가 실제로 얼마나 강한지 확인하려 하고 있다.
시장의 또 다른 관심사는 오는 25일 발표되는 5월 개인소비지출(PCE) 물가지수다. PCE는 연준이 가장 중요하게 보는 물가 지표다. 특히 케빈 워시 의장 체제의 연준이 지난주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회의에서 예상보다 강한 매파적 신호를 보낸 이후 시장 분위기는 크게 달라졌다. 현재 금리선물 시장은 연준이 9월 회의에서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추가 인상할 가능성을 상당 부분 반영하고 있다.
빌 노시는 “유가 하락은 소비자와 기업 모두에 긍정적이지만 연준이 물가 안정에 더 집중할 것이라는 인식이 확산하면서 국채금리가 상승했고 이는 증시에 부담을 주고 있다”고 진단했다. UBS 글로벌자산운용의 울리케 호프만-부르샤르디는 “중동 정세는 여전히 시장 변동성의 중요한 변수지만 앞으로는 AI 랠리가 얼마나 지속될 수 있는지에 대한 투자자들의 신뢰가 시장 방향을 결정할 가능성이 더 크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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