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가 지난 1일 대만 타이베이에서 열린 컴퓨텍스 2026에서 신형 그래픽저장장치(GPU)를 공개하고 있다. (사진=AFP)
가장 뜨거운 수요는 AI 모델을 학습시키고 돌리는 데 쓰이는 그래픽처리장치(GPU)에서 나오고 있다. 일부 기업들은 성능이 좋은 GPU를 쓰기 위해 직원 월급보다 더 많은 돈을 쓰기 시작했다. 한때 기술자들만 쓰던 ‘컴퓨트’(compute·연산 능력)라는 전문용어도 어느새 일상적으로 쓰이고 있다.
◇GPU 한 시간 빌리는 값도 거래 상품…‘컴퓨팅 선물’ 뜬다
이처럼 GPU가 핵심 자산으로 떠오르면서 시장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뉘고 있다. GPU를 가진 쪽은 비싼 장비를 놀리지 않고 돈벌이로 연결하려 하고, 빌려 쓰는 쪽은 이용료가 갑자기 뛸 때를 대비(헤지)하려 하기 때문이다. 이 두 수요를 겨냥한 금융상품과 중개 업체가 속속 등장하고 있다.
먼저 GPU를 가진 쪽을 보면, AI용 고성능 GPU를 빌려주는 데 특화된 이른바 ‘네오클라우드’ 기업들이 칩 자체를 담보로 돈을 빌리기 시작했다. 2024년 호주 투자은행 맥쿼리는 네오클라우드 업체 람다에 엔비디아 칩을 담보로 5억달러(약 7692억원)를 빌려주는 거래를 주선했다. 최대 네오클라우드인 코어위브는 49개 데이터센터와 약 1기가와트(GW)에 이르는 컴퓨팅 전력 용량을 바탕으로 블랙스톤 등으로부터 대출을 받았다. 이 대출은 GPU와 장기 고객 계약에서 나오는 수익을 함께 담보로 삼아 설계됐다.
빌려 쓰는 쪽을 위한 상품도 잇따라 출시되고 있다. GPU 임대료는 어느 클라우드 업체에서 언제 빌리느냐에 따라 제각각이다. 이를 겨냥해 실리콘데이터는 지난달부터 엔비디아의 H100 칩을 1시간 빌리는 평균 가격이 얼마인지 매일 조사해 지수(가격표)로 만들어 제공하는 서비스를 시작했다.
스마트폰 시세를 매일 비교해주는 업체처럼, 들쭉날쭉한 컴퓨팅 가격을 한눈에 보여주는 기준표를 만든 것이다. 이를 토대로 값이 오를지 내릴지에 베팅하거나, 미래 가격을 미리 정해두고 사고파는 ‘선물’ 상품까지 거래할 수 있게 한다는 게 실리콘데이터의 구상이다. 회사는 파생상품 거래소를 운영하는 CME그룹, 뉴욕증권거래소(NYSE) 모회사인 인터컨티넨털익스체인지(ICE)와도 손을 잡았다.
◇ETF로 대중화 길목…10년 전 첫 시도는 좌초
대형 기업을 중심으로 컴퓨팅 가격 변동을 유가·금리·환율처럼 미리 막아두려는 헤지 수요가 커지면서 관련 금융 상품 경쟁도 치열해지고 있다. 소프트웨어 업체 아키텍트 파이낸셜 테크놀로지스는 버뮤다에 컴퓨팅 선물 거래소를 차렸고, 미국에서 허가를 받은 거래소도 준비하고 있다. 이 회사를 이끄는 브렛 해리슨 CEO는 2022년 무너진 암호화폐 거래소 FTX의 미국 법인 ‘FTX US’를 운영했던 인물이다. 그는 컴퓨팅뿐 아니라 구리·은 같은 원자재, AI 칩과 데이터센터에 필요한 에너지원까지 거래하는 시장을 만들겠다고 밝혔다.
라운드힐 인베스트먼츠와 프로셰어스는 컴퓨팅 선물을 기초로 한 ETF 출시를 위해 증권당국에 서류를 냈다. 선물이 기관과 전문 투자자의 영역이라면, ETF는 일반 투자자도 손쉽게 컴퓨팅 파워에 투자할 수 있는 길을 연다. 아직은 실험적인 측면이 강하지만, 컴퓨팅 파워를 GPU 중심의 ‘거래 가능한 금융자산’으로 만들려는 시도가 본격화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사실 컴퓨팅 파워를 사고팔려는 시도가 처음은 아니다. 2014년 독일의 기술자와 금융 플랫폼 운영자들은 ‘도이체뵈르세 클라우드 익스체인지’라는 거래소를 열었다. 기업들이 남는 컴퓨팅 파워 이용권을 사고파는 곳이었다. 하지만 당시 주로 쓰이던 범용 칩인 중앙처리장치(CPU)는 규격을 똑같이 맞추기가 너무 어려웠고, 종류가 다른 클라우드를 하나로 묶는 비용도 비쌌다. 선물·옵션 거래로 이어지리라던 기대는 무산됐고, 이 사업은 2016년 문을 닫았다. 아이디어는 좋았지만 시대가 따라주지 못한 셈이다.
(사진=AFP)
다만 컴퓨팅 파생상품이 널리 쓰이려면 표준화가 먼저 이뤄져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칩 종류마다 성능이 다르고, 같은 칩이라도 클라우드 사업자나 데이터센터 위치, 연결 방식에 따라 가치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업계 일각에서는 제대로 작동하는 파생상품 시장이 만들어지기까지 10년은 걸릴 것이라는 회의론도 제기된다.
그러나 H100 칩이 차세대 블랙웰 칩이 등장한 뒤에도 임대 가치를 상당 부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은 낙관론을 뒷받침한다. 이코노미스트는 차세대 칩이 나오면 기존 칩 가치가 순식간에 사라질 것이라는 우려가 과장됐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평했다.
컴퓨팅 파워가 ‘AI 시대의 돈’으로 자리 잡으면서, 이 시장을 먼저 차지하려는 경쟁은 갈수록 뜨거워질 전망이다. 해리슨 CEO가 거래 대상으로 전력원까지 꼽은 데서 보듯, AI를 돌리는 데 드는 비용 자체가 사고파는 상품이 되는 흐름은 더 넓어질 것으로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