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TO 만장일치 원칙 깨자…日 "3분의 1 찬성이면 협정 체결" 제안

해외

이데일리,

2026년 7월 21일, 오전 09:36

[이데일리 방성훈 기자] 일본 정부가 세계무역기구(WTO)의 만장일치 의사결정 원칙을 완화하자는 개혁안을 내놨다. 회원국이 모두 찬성해야 규칙을 만들 수 있는 지금의 구조로는 아무것도 못 한다고 보고, 뜻이 맞는 나라들끼리 먼저 협정을 맺을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촉발한 보호주의와 중국의 국가자본주의 사이에서, 규칙에 기반한 자유무역 체제의 뼈대만이라도 지켜내려는 시도로 풀이된다.

(사진=AFP)
(사진=AFP)
21일 니혼게이자이(닛케이)신문에 따르면 일본 정부는 이달 14~15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WTO 일반이사회 협의에 맞춰 이런 내용의 제안서를 WTO에 제출했다. 협정에 참여하는 나라가 WTO 회원국의 3분의 1 이상이고 반대국이 10분의 1을 넘지 않으면 협정을 체결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이 골자다.

WTO는 회원국·지역이 166곳으로 늘면서 사실상 마비 상태다. 나라마다 이해관계가 갈리는데 만장일치 원칙 탓에 한 곳이라도 반대하면 규칙을 만들 수 없다 보니, 모든 나라가 참여하는 형태로 무역 규칙을 짜는 일 자체가 어려워졌다.

일본이 활로로 삼은 것은 특정 분야에서 뜻이 맞는 나라들끼리 무역 자유화에 합의하는 ‘복수국간 협정’이다. 전체 합의가 안 되면 되는 나라들끼리라도 먼저 하자는 발상이다. 그런데 지금은 이 협정을 WTO 협정 안에 추가하는 데도 만장일치가 필요해, 단 한 나라만 반대해도 채택을 막을 수 있다. 협정에 반대하는 나라에 그 협정으로 어떤 손해를 보는지 설명할 의무를 지우자고 일본이 제안한 것도 이 때문이다.

만장일치의 벽은 이미 현실로 확인됐다. 지난 3월 카메룬 각료회의에선 전자상거래 협정을 복수국간 협정으로 채택하려 했지만, 의견 일치가 이뤄지지 않아 ‘잠정 조치’ 형태로만 채택됐다. 적극 활용하자는 분위기는 무르익었는데 규칙이 발목을 잡은 셈이다.

일본은 자유무역을 왜곡하는 불투명한 보조금을 규제하는 규칙도 함께 제안했다. 국영기업 등에 기간·금액 제한 없이 채무보증을 서주거나, 경영난에 빠진 기업에 보조금을 주는 행위에 제동을 걸자는 내용으로, 사실상 중국을 겨냥한 것으로 풀이된다. 불공정한 보조금 지급을 WTO에 알리는 ‘역통보’ 제도 도입도 요구했다.

‘개발도상국’ 정의를 손보자는 주장도 폈다. WTO는 개도국에 원칙적으로 금지된 수출보조금을 허용하고 우대 관세율도 적용해주는데, 정작 개도국이 무엇인지 정의가 없어 각국이 스스로 신고하면 그만이다. 개혁안은 세계은행이 고소득국으로 분류했거나, 상위중소득국이면서 수출액이 세계 총수출의 1% 이상인 나라는 지위를 재검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경제 규모가 커진 뒤에도 개도국 혜택을 놓지 않는 나라들을 정리하자는 취지다.

일본은 내년 2월께까지 분야별 회합과 일반이사회에서 협의를 이어간 뒤, 내년 봄 각료급 중간 검토를 거쳐 2028년 봄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 각료회의에서 채택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다만 실현될지는 미지수다. 지난 3월 각료회의에서도 WTO 개혁을 논의했지만 작업 계획조차 채택하지 못했다. 제도를 손보는 일 역시 만장일치가 필요한 데다, 규제 대상이 될 나라들이 순순히 찬성할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만장일치를 깨려면 만장일치가 필요한 모순적인 상황이다.

일본이 총대를 멘 배경에는 절박함이 있다. 에너지와 식량 등 필수 물자를 수입에 의존하고 전후 경제 발전도 수출이 견인한, 자유무역의 혜택을 오래 누려온 나라이기 때문이다. 통상 문제에 밝은 스가와라 준이치 오울즈컨설팅그룹 이그제큐티브 펠로는 “일본이 국제 무역 규칙을 손보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의미는 크다”고 말했다.

WTO의 권위는 166개국이 모두 합의했다는 정통성에서 나왔다. 그 원칙을 스스로 내려놓자는 것은 완벽한 규칙을 포기하더라도 다자체제의 실질을 남기겠다는 현실론인 셈이다.

중국의 국영기업 지원과 개도국 우대 활용은 미국이 WTO를 불신해온 핵심 이유이기도 한 만큼, 미국의 문제의식을 다자 틀 안에서 처리해 보임으로써 이탈한 미국을 다시 끌어들이려는 계산도 깔린 것으로 보인다.

관세를 지렛대로 상대국을 하나씩 불러 세우는 트럼프 행정부의 방식에서는 규칙이 아니라 힘의 크기가 조건을 정한다. 시장이 작고 수출 의존도가 높은 나라일수록 불리할 수밖에 없는 구조여서 일본의 제안이 한국에도 남의 일이 아니라는 평가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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