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기묘한 상황도 가능하다. 연준 의장이 기자회견에서 일부러 모호하게 말한다. AI가 연준의 정책을 너무 정확하게 예측해 금융거래에 이용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중앙은행이 공들여 쌓아온 ‘투명한 통화정책’의 원칙을 AI 때문에 스스로 뒤집어야 하는 셈이다.
공상과학 영화 속 이야기가 아니다. 세계 중앙은행 관계자들이 모인 잭슨홀 경제정책 심포지엄에서 실제로 제기된 미래 시나리오다.
[본 이미지는 AI 기술을 활용해 제작되었습니다.]
◇AI가 연준 결정 전에 연준을 읽는다
핵심은 AI와 인간의 정보처리 능력 차이다.
브루너마이어는 AI의 정보처리 능력이 인간보다 월등해 머지않아 중앙은행 정책 담당자들이 무엇을 할지 스스로 완전히 인식하기도 전에 AI가 이를 거의 확실하게 예측할 수 있다고 봤다.
쉽게 말해 연준의 경제전망과 정책결정 패턴, 위원들의 발언과 각종 경제지표 등을 AI가 순식간에 분석해 다음 정책을 예측할 수 있다는 얘기다. AI는 이를 토대로 당국의 조치를 우회하면서 수익을 낼 수 있는 거래전략을 짤 수 있다. 이런 AI 에이전트가 금융시장에 대규모로 투입되면 금융당국을 앞서 움직이며 시장의 작동 방식 자체를 바꿀 수 있다는 게 브루너마이어의 경고다.
그는 이를 ‘비대칭적 이해(asymmetric understanding)’라고 불렀다.
브루너마이어는 “인간이 AI 에이전트와 상호작용하는 세계에서는 시장의 정보성이 떨어지고 더 불규칙해지는 극단적인 상황이 나타날 수 있다”며 “중앙은행은 시장이 자신들보다 중앙은행을 더 잘 이해하는 게임에 직면하게 된다”고 경고했다.
◇“AI가 너무 잘 알아듣는다”…연준이 일부러 모호해진다면
더 흥미로운 대목은 그다음이다. AI가 중앙은행의 행동을 지나치게 잘 예측한다면 중앙은행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브루너마이어가 제시한 대응 시나리오 중 하나는 역설적으로 ‘덜 투명한 중앙은행’이다.
중앙은행들은 지난 수십 년 동안 시장과 더 명확하게 소통하는 방향으로 진화해왔다. 정책방향과 경제전망을 적극적으로 설명해 시장의 불확실성을 낮추는 것이다. 명확한 커뮤니케이션은 시장 변동성을 낮추고 효율성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상대방이 사람이 아니라 AI라면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게 브루너마이어의 문제 제기다. AI가 중앙은행의 말과 행동을 정확하게 학습할수록 중앙은행의 높은 예측 가능성이 오히려 금융시장 참가자에게 이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투명성은 다시 생각해야 한다”며 “예측 가능성은 금융 지배력 게임에서 상대방을 무장시킨다”고 지적했다. 이어 “따라서 더 큰 불투명성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가능하다”고 했다.
극단적으로는 중앙은행이 AI가 자신의 다음 행동을 예측하지 못하도록 일부러 모호하게 말하거나 예상 밖의 행동을 해야 하는 상황도 가능하다.
프린스턴대 경제학 교수이자 벤드하임 금융센터 소장인 마르쿠스 브루너마이어 (사진=프린스턴대)
더욱 이색적인 아이디어도 등장했다.
연준이 통화정책 발표 후 인간을 위한 기자회견과 AI를 위한 기자회견을 별도로 개최하는 방안이다. 인간에게는 정책을 이해할 수 있는 설명과 서사를 제공하고, 기계에는 AI가 학습할 수 있는 데이터를 별도로 제공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브루너마이어는 이런 방안조차 문제를 일부 완화하는 데 그칠 것으로 봤다. AI가 금융시장에 광범위하게 적용될 경우 가장 정교한 AI를 보유한 시장 참가자와 그렇지 못한 사람 사이의 격차가 커지고, 금융기관과 제도에 대한 신뢰까지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이다.
AI를 활용한 시장조작 위험에 대응하기 위해 중앙은행이 신용시장에 직접 개입하거나 대차대조표를 확대해야 하는 상황도 제시됐다. 이는 작은 중앙은행 대차대조표를 선호하는 케빈 워시 연준 의장 등의 정책 철학과도 충돌한다.
◇워시는 AI의 ‘위험’보다 ‘생산성’에 주목
다만 잭슨홀의 중앙은행 관계자들이 당장 이런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현실로 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수전 콜린스 보스턴 연방준비은행 총재는 “AI와 금융 혁신은 실질적인 기회를 제공하지만 불법 활동이 늘어나지 않는지 확인해야 할 위험 영역도 분명히 있다”며 브루너마이어의 논문이 극단적인 가능성을 제시함으로써 논의를 촉진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현재 중앙은행들의 관심은 보다 현실적인 문제에 맞춰져 있다. AI가 노동시장과 생산성, 물가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스테이블코인과 분산원장 기술이 금융시스템과 실물경제를 어떻게 변화시킬지 등이 대표적이다.
워시 의장 역시 지난 28일 잭슨홀 기조연설에서 AI의 위험보다는 경제적 잠재력에 무게를 뒀다. 워시는 “AI의 활용이 경제 전반에 걸쳐 생산성을 상당하고 지속적으로 높일 것인가. 그렇다면 언제인가”라고 질문했다. 이어 “AI가 새로운 변수, 잠재적으로는 새로운 생산요소이며 경제와 통화정책 운용 모두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있다”고 말했다.
브루너마이어도 AI의 긍정적인 가능성을 부정하진 않았다. AI는 인간보다 정교하게 위험을 관리하고 금융시장을 감독하는 도구가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그가 잭슨홀에서 굳이 가장 극단적인 미래를 꺼내든 배경에는 AI가 중앙은행을 앞서 읽는 시대가 실제로 오기 전에 중앙은행과 금융당국이 대비해야 한다는 메시지가 있다.
케빈 워시 미국 연방준비제도 의장 (사진=로이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