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기업들이 미국 정부의 제재에도 회사 이름을 바꾸거나 자회사를 설립하는 방식으로 엔비디아의 고성능 AI 칩을 구매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제재가 특정 회사 이름과 주소에만 적용된다는 허점을 파고들어 간판만 바꿔 단 것이다.
6일(현지시간) 뉴욕타임스(NYT)가 수천 건의 선적 기록과 기업 문서, 공급 계약을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인스퍼의 미국 자회사 에이브레스는 2024년 4월부터 올해 2월까지 최소 56억달러(약 7조 5572억원)어치 첨단 기술 제품을 미국에서 동남아시아로 수출했다. 이 가운데 30억달러(약 4조 485억원) 이상이 엔비디아의 최신 ‘블랙웰’ 칩을 탑재한 컴퓨터와 장비였다.
(사진=AFP)
미국은 블랙웰 같은 최첨단 칩이 중국 기업에 들어가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중국이 AI를 해킹과 감시, 군사 작전에 쓸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최근 중국 AI 기업들이 미국 경쟁사와의 성능 격차를 빠르게 좁히면서 이들이 미국 기술을 쓰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의심도 커졌다. 하지만 중국 기업이 동남아 데이터센터에 원격 접속하는 것을 막는 규정은 사실상 없다.
블랙리스트에 오른 기업은 3000곳이 넘는다. 그러나 제재는 미 정부가 지정한 회사 이름과 주소에만 적용된다. 인스퍼는 이 점을 파고들었다. 미국에서 간판을 바꿔 단 것과 마찬가지로, 중국에서는 제재 지정 며칠 만에 본사 등기 주소를 같은 거리의 다른 건물로 옮겼다.
NYT 기자가 인스퍼가 새로 등록한 등기 주소를 찾아갔더니 간판도 없는 건물이었다. 실제 본사는 인근 산업단지에 위치해 있었으며, 이곳에는 짙은 회색 고층 건물들이 늘어서 있었다. 정문 안쪽 붉은 전광판에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중국몽’ 구호가 흐르고 있었다고 NYT는 전했다.
산둥성이 지분 대부분을 보유한 인스퍼는 세계 최대 서버 제조사 중 하나다. 중국군과 정부가 10여년 전부터 이 회사 서버를 쓰면서 미국의 표적이 돼 2020년 중국 군사기업 명단에, 2023년 블랙리스트에 각각 올랐다. 하지만 인텔 등은 모회사가 아닌 자회사와 거래를 이어갔다. 지난해 미국이 일부 자회사를 명단에 추가했을 때도 에이브레스는 빠졌다.
◇동남아 거쳐 중국으로…의문의 신생 기업
에이브레스가 보낸 물량은 알리바바, 바이트댄스 등 중국 대형 IT 기업을 고객으로 둔 동남아 데이터센터와 기술기업으로 흘러갔다. 미 당국이 밀수 여부를 조사 중인 중국계 기업 메가스피드도 수취인에 포함됐다. 말레이시아 기업 문서상 메가스피드의 한 자회사는 알리바바와 재무적으로 얽혀 있다.
또 다른 경로는 말레이시아다. 인스퍼 계열사들과 거래하는 현지 전자업체가 상표 없는 고가 서버를 중국으로 실어 날랐고, 이를 받은 곳이 지난해 설립된 마진프라였다. 이 회사는 6개월 만에 7억달러(약 9447억원) 넘는 서버를 수입했는데 이 중 1500대 이상이 고성능 AI 사양에 해당하는 가격대였다.
마진프라는 서류상 인스퍼와 아무 관계가 없다. 그러나 국유기업인 데다 인스퍼 본사와 같은 거리에 있고, 등록 특허 상당수를 인스퍼 출신 발명자들이 출원했다. 등록 주소를 찾아가 보니 빈 책상만 놓인 잠긴 방이었다. 이 회사는 지난해 11월 중국 국유은행 계열사와 1억 6500만달러(약 2227억원) 규모 고성능 컴퓨팅 장비 공급 계약도 맺었다. 국방 연구와 연결된 중국 대학들이 인스퍼와 마진프라 서버를 확보한 정황도 확인됐다.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가 지난해 1월 6일 미국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소비자가전전시회(CES) 기조연설에서 '그레이스 블랙웰 NV링크72'를 들어 보이고 있다. (사진=AFP)
트럼프 행정부는 중국 기업의 해외 데이터센터 원격 접속을 막던 전임 행정부 규제를 되돌렸다. 지난해 중국의 반발을 부른 뒤로는 제재 확대에도 신중해졌다. 블랙리스트를 집행하는 상무부에서는 10개월째 신규 지정이 한 건도 없었다. 18년 만의 최장 공백이다. 마진프라는 오히려 올해 엔비디아 H200 칩 수출 허가를 받았다.
백악관은 현대사에서 가장 엄격한 수출통제를 시행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엔비디아도 “우회 제품을 지지하지 않는다”며 수출통제 준수를 확인한 파트너에게만 판매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에이브레스는 실리콘밸리에서 버젓이 영업 중이다. 엔비디아의 ‘엘리트 파트너’이자 산호세 연례 콘퍼런스 후원사로 이름을 올렸고, 올해 5월에는 차세대 AI 서버를 양산하는 20여개 기업 중 하나로 지목됐다.
조던 나노스 세미애널리시스 애널리스트는 에이브레스가 모회사와 같은 서버, 같은 직원, 같은 사무실로 영업하는데도 당국이 손을 놓고 있다며 “그들을 막겠다는 건가, 아니면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