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8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맨해튼 파크 애비뉴 아모리의 웨이드 톰슨 드릴 홀에서 전도연(왼쪽 다섯번째)·박해수(왼쪽 여섯번째) 등 연극 '벚꽃동산' 출연진이 인사하자 관객들이 일어나 박수치고 있다. (사진=이데일리 성주원 특파원)
호주 출신 연출가 사이먼 스톤(Simon Stone)이 체호프의 마지막 희곡을 현대 한국으로 옮긴 연극 ‘벚꽃동산’이다. 스톤은 지난 18일(현지시간) 뉴욕 파크 애비뉴 아모리에서 열린 인플루언서 대상 행사에 참석해 한국 사회에서 발견한 강한 계급관계가 이 작품을 현대 한국으로 옮기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됐다고 설명했다.
스톤은 “유럽에서 신작을 위해 작품을 골랐다면 ‘벚꽃동산’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그 이유는 이 가족 안에서 발견되는 위계질서가 (유럽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한국의 경우 건강하지 못한 위계질서나 관계성이 아직 사회 곳곳에 존재하는 것 같다”며 “같은 맥락에서 전통을 완전히 무시해 버리는 서구의 전통도 건강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가 주목한 것은 단순한 ‘부자 대 가난한 사람’의 대립이 아니다. 스톤은 “부자들은 자신의 부를 축소시켜 말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재산을 올려서 말하는 경향이 있다”며 “부자는 부자인 게 부끄럽고,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한 게 부끄러워서 두 계층 모두 부에 대한 각자의 지대에 존재하기 위해 엄청난 양의 거짓말을 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안톤 체호프 원작 '벚꽃동산'(The Cherry Orchard)을 각색·연출한 사이먼 스톤이 지난 18일(현지시간) 작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이데일리 성주원 특파원)
하지만 황두식 역시 과거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 성공한 사업가가 됐지만 과거의 결핍과 재벌가를 향한 인정 욕구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그가 송도영 가족의 집을 사들이고 철거를 선언하는 마지막 장면은 단순한 신흥 부자의 승리라기보다 낡은 계급질서가 또 다른 질서로 교체되는 순간처럼 다가왔다.
극 중 이상주의자 변동림(남윤호)의 존재도 눈에 띈다. 그는 돈과 이윤만을 좇는 사회와 과거의 가치를 붙잡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세상을 동시에 비판한다. 그러나 정작 자신의 이상을 현실로 연결하지 못한다. 권력과 부, 사회의 모순을 향한 날카로운 비판이 현실 앞에서는 공허한 수사처럼 들릴 수도 있다는 역설이 남는다.
전도연(오른쪽)이 지난 16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파크애비뉴 아모리에서 열린 연극 ‘벚꽃동산(The Cherry Orchard)’ 드레스 리허설에서 공연하고 있다. 사이먼 스톤이 연출한 이 작품은 안톤 체호프의 원작 배경을 러시아에서 현대 서울로 옮겨 재해석했다. (사진=파크애비뉴 아모리)
무대는 이런 인물들을 거대한 ‘유리집’ 안에 담았다. 뉴욕 파크 애비뉴 아모리의 5만5000제곱피트 규모 웨이드 톰슨 드릴 홀 한가운데 건축가 사울 킴(Saul Kim)이 설계한 투명한 집이 놓였다. 뉴욕 공연에서는 세트 아래 별도 플랫폼을 설치해 집이 거대한 어둠 속 외딴섬이나 빙산처럼 떠 있는 모습을 만들었다. 제작진은 이를 통해 모든 것을 잃어가는 인물들의 고독과 고립감을 강조했다고 설명했다.
새하얀 집은 역설적으로 내부를 숨길 수 없게 만들었다. 관객은 유리벽 너머 가족의 식사와 다툼, 사랑과 배신을 동시에 들여다볼 수 있다. 하얀 집과 인물들 위로 검은 눈이 쏟아지는 장면은 몰락해가는 가족의 풍경을 더욱 낯설게 만들었다. 광활한 드릴 홀은 오히려 한 가족의 사생활을 가까이 훔쳐보는 공간으로 바뀌었다.
한국에서 출발한 작품이 뉴욕이라는 공간과 만나는 재미도 있다. 공연 중 뉴욕과 지하철 등 현지 관객에게 익숙한 소재가 등장할 때마다 객석에서는 웃음이 터졌다. 개막 공연에서도 극 중 ‘뉴욕’이 언급되는 대목에서 수시로 큰 웃음이 나왔다. 뉴욕대(NYU) 스커볼 공연예술센터의 제이 웨그먼 예술감독 역시 “뉴욕이 작품 속 중요한 준거점으로 등장하는 만큼 다른 사람들의 해석을 통해 뉴욕이 어떻게 바라보이는지를 보는 것도 흥미로웠다”고 평가했다.
지난 16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파크애비뉴 아모리에서 열린 연극 ‘벚꽃동산(The Cherry Orchard)’ 개막 공연 모습. 이 연극의 주무대인 하얀 유리집이 보인다. (사진=파크애비뉴 아모리)
전도연과 박해수를 비롯한 한국 배우 10명이 출연하는 뉴욕 공연은 오는 26일까지 총 11차례 열린다. 회당 약 1200석의 공연은 모두 매진됐다고 LG아트센터 측은 전했다. 스톤은 이번 작업에서 발견한 K컬처의 힘을 ‘포용력’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세상을 향해 열린 태도, 다양한 목소리에 대한 기대, 그리고 ‘한국의 목소리란 무엇인가’에 대한 단단한 확신이 있기에 한국은 나와 같은 이방인을 두려워하지 않고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