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AFP)
1일(현지시간)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미 당국은 중국이 엔비디아 AI 칩 11만5000개 이상에 해당하는 컴퓨팅 능력을 밀반입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블룸버그가 지난해 보도한 중국 서부 사막지대 데이터센터 계획 물량이다. 당시 엔비디아와 각국 당국은 수출통제를 감안하면 비현실적인 계획이라고 평가했지만, 미 당국의 판단대로라면 이를 웃도는 물량이 이미 중국에 들어간 셈이다.
반도체 분석업체 세미애널리시스는 공급망 점검과 생산·설치 데이터 비교 등을 토대로 수십만개의 AI 칩이 통제망을 빠져나간 것으로 추산했다. 소규모 데이터센터 여러 곳이나 초대형 데이터센터 몇 곳을 채울 수 있는 규모다.
밀수의 상징이 된 장면은 지난 3월 미 검찰이 공개한 감시카메라 사진이다. 동남아의 한 창고에서 한 여성이 빨간 헤어드라이어의 뜨거운 바람으로 서버 포장에 붙은 일련번호 스티커를 떼어내는 모습이 담겼다.
이 사건으로 미 서버업체 슈퍼마이크로의 공동창업자 월리 랴오 등 3명이 기소됐다. 이들은 25억달러(약 3조3975억원) 규모의 서버를 동남아 업체에 팔아 중국 고객에게 넘어가게 한 혐의를 받는다. 블룸버그는 소식통을 인용해 해당 중개업체가 태국 방콕의 디지털 인프라 업체 오본(OBON)이라고 전했다. 랴오는 무죄를 주장하고 있으며 재판은 내년 3월 시작된다.
비슷한 사건은 아시아 곳곳에서 잇따르고 있다. 대만에선 인프라 업체 플라잉타이거가 엔비디아 최신 ‘블랙웰’ 칩이 탑재된 서버 130대를 주문한 뒤 74대를 일본과 인도네시아를 거쳐 중국으로 빼돌린 혐의를 받는다. 나머지 56대는 지난 5월 대만 해경에 압수됐고, 사건의 핵심 인물로 의심받는 엔비디아 관리자도 체포됐다.
싱가포르에선 지난 7월 검찰이 밀수 수익으로 산 것으로 의심되는 4000만달러(약 543억6000만원)짜리 저택을 압수했다.
미 정부는 밀수된 칩 일부가 딥시크 등 중국 AI 기업에 흘러가 앤스로픽·오픈AI와의 경쟁을 도왔다고 보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딥시크가 네이멍구 데이터센터에 블랙웰 칩을 설치한 것으로 보고 있으며, 알리바바도 랴오 사건의 최종 고객 중 하나로 의심받고 있다. 알리바바는 관련 사실을 부인했다.
◇“위험신호 놓쳤다” vs “바다에 물 한 방울”
엔비디아가 수출통제를 위반했다거나 밀수를 고의로 도왔다는 혐의를 받은 적은 없다. 하지만 미 당국자와 업계 전문가들은 엔비디아의 고객 실사에 허점이 있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플라잉타이거가 빌린 공간은 주문한 서버를 다 들여놓기엔 턱없이 좁았다. 오본이 산 서버를 돌리려면 100메가와트(MW) 넘는 데이터센터가 필요했다. 태국 전체에서 가동 중인 데이터센터 용량이 수백MW에 불과한데도 슈퍼마이크로는 판매를 승인했다. 공소장에 따르면 오본의 건물 임대계약은 가짜였다.
조 바이든 전 행정부와 트럼프 행정부에서 국무부 AI 정책을 이끈 대니얼 렘러는 “중국 고객을 위한 게 아니라면 어떻게 그렇게 많은 칩이 동남아로 갈 수 있는지 한 번도 제대로 된 답을 듣지 못했다”고 꼬집었다.
엔비디아는 다른 업체들의 밀수는 인정하면서도 규모가 미미하다는 입장이다. 엔비디아 대변인은 “정부와 언론이 찾아낸 우회 반출은 중국이 이미 보유한 거대한 컴퓨팅 바다에 비하면 물 한 방울”이라며 “미 검찰이 주장한 우회 반출 물량은 엔비디아 제품의 0.5%도 안 된다”고 말했다. 중국 반도체 업체들은 올해 약 200만개의 AI 칩을 생산할 것으로 예상된다.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 (사진=AFP)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가 트럼프 대통령과의 친분을 바탕으로 수출 규제 완화를 이끌어낸 것도 허술한 단속에 영향을 미쳤다는 진단이다. 그는 지난해 12월 트럼프 대통령을 설득해 구형 ‘호퍼’ 칩을 최대 100만개까지 중국에 팔 수 있게 했다. 블랙웰 칩 수출은 여전히 금지돼 있지만, 이 조치로 중국 기업들은 화웨이 최고 제품과 맞먹는 칩을 확보할 수 있게 됐다.
트럼프 1기 국가안보회의(NSC)에서 중국 정책을 맡았던 리자 토빈은 “엔비디아 CEO가 트럼프 대통령의 각료들보다 수출통제 정책에 더 큰 영향력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단속 역량도 부족하다는 지적이다. 수출통제를 맡은 상무부 산업안보국(BIS)의 해외 단속 인력은 올해 예산이 늘기 전까지 10여명에 불과했다. 혐의를 포착하고도 권한을 다 쓰지 않았다는 비판도 나온다.
BIS는 플라잉타이거의 밀수망을 일찍 알고도 선적을 막지 않았고, 슈퍼마이크로에 오본 판매 중단을 강제가 아닌 ‘자발적 요청’ 형태로만 요구했다. 암시장 중개상들은 이제 유럽과 중동을 경유하는 새 경로로 우회하고 있다. 한 미 당국자는 “우리가 해본 것 중 최악의 두더지 잡기 게임”이라고 토로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