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자 덜 먹고 옷도 작게 입고”…美 비만약이 바꾼 소비지도

해외

이데일리,

2026년 October 28일, PM 02:39

[이데일리 신수정 기자] 비만치료제가 미국과 유럽의 소비 지형을 바꾸고 있다. 헬스장과 영양제, 미용 업계는 새 고객을 맞고 있지만 과자와 패스트푸드, 빅사이즈 의류 업계는 매출 감소에 직면했다. 기업들은 양을 줄이고 값을 유지하거나 올리는 방식으로 수익성 방어에 나섰다.

비만치료제가 미국과 유럽의 소비 지형을 바꾸고 있다. 사진은 비만약을 직접 투여하는 모습. (사진=뉴시스)
비만치료제가 미국과 유럽의 소비 지형을 바꾸고 있다. 사진은 비만약을 직접 투여하는 모습. (사진=뉴시스)
26일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여론조사기관 갤럽 집계 결과 지난 6월 기준 미국에서 GLP-1 계열 비만치료제를 복용하는 사람은 약 3800만명이다. 미국인 10명 중 1명꼴이다. 영국에서도 성인의 약 5%가 이 약을 쓰고 있다고 회계법인 PwC는 추정했다. GLP-1은 원래 당뇨병 치료제로 개발됐으며 인슐린 분비를 촉진해 식욕을 억제한다. 노보노디스크의 ‘위고비’가 2021년 미국 식품의약국(FDA)에서 만성 체중 관리용으로 처음 승인받은 뒤 사용이 급격히 늘었다.

기업들의 관심도 커졌다. 헬스케어를 제외한 상장사 200곳 이상이 지난 7~9월 실적 발표에서 GLP-1이나 비만치료제를 언급했다. 1년 전 같은 기간의 두 배가 넘는다. 펩시코, 도미노피자, 스테이크 체인 텍사스로드하우스 등은 비만치료제가 식습관을 바꾸는 점을 사업 위험 요인으로 꼽았다. 영국에서는 현재 복용률 기준으로 식료품 지출이 연간 7억8000만파운드(약 1조3800억원) 줄어든 것으로 시장조사업체 월드패널바이뉴머레이터는 추정했다.

복용자는 앞으로 더 늘어날 전망이다. 주사제 위주였던 비만치료제가 먹는 알약 형태로 나오고 생산비도 낮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위고비와 오젬픽의 주성분인 세마글루타이드 특허가 2030년대 초 미국과 유럽에서 만료되면 값싼 복제약도 나올 수 있다. 지금까지는 고소득층에 복용이 집중됐다.

◇헬스장·영양제·미용 ‘수혜’

가장 큰 수혜 업종은 피트니스다. 비만치료제 복용자는 체중이 빠르게 줄면서 지방뿐 아니라 근육량과 골밀도도 함께 잃기 쉬워 근력 운동을 찾는다. PwC 영국 조사에서 복용자의 27%는 운동 관련 지출을 늘리겠다고 답했고, 줄이겠다는 응답은 5%에 그쳤다. 미국 복용자의 달리기·자전거·수영 등 유산소 운동 빈도는 36% 늘었다.

유럽 최대 헬스장 체인 퓨어짐과 미국 최대 체인 플래닛피트니스, 영국 더짐그룹은 근력·기능성 운동 공간을 넓혔다. 플래닛피트니스는 원격진료로 비만치료제를 처방하는 업체 로(Ro)와 제휴했다. 콜린 키팅 플래닛피트니스 최고경영자(CEO)는 지난 8월 실적 발표에서 이 제휴가 가장 성공적이고 많이 쓰이는 회원 혜택 중 하나라고 말했다.

부작용을 보완하려는 수요도 커졌다.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이 복용자 1500명을 조사한 결과 이들은 비복용자보다 영양제에 20% 더 지출했다. 근손실을 막는 단백질, 소화를 돕는 식이섬유, 피부 처짐을 막는 콜라겐 순으로 지출이 많았다. 스위스 피부과 기업 갈더마는 얼굴 처짐을 개선하는 주사제 ‘스컬트라’ 수요가 급증했다. 런던에서 시술비가 500파운드(약 89만원)를 넘는 제품이다. 로레알도 피부 처짐과 탈모를 겨냥한 세럼 등을 내놓고 있다.

항공사는 연료비 절감을 기대한다. 투자은행 제프리스의 시일라 카햐오글루 애널리스트는 보잉 737 맥스8 승객 178명의 평균 체중이 10% 줄면 이륙 중량이 2% 감소한다고 분석했다. 미국 4대 항공사로 따지면 연간 약 5억8000만달러(약 7700억원)를 아낄 수 있다는 계산이다. 이란 전쟁으로 항공유 가격이 두 배로 뛴 만큼 효과가 작지 않다는 설명이다. 다만 마진이 높은 기내 간식·주류 판매가 줄어 절감 효과가 상쇄될 수 있다.

◇과자·패스트푸드·빅사이즈 의류 ‘피해’

식품업계는 직격탄을 맞았다. 미국 코넬대와 뉴머레이터가 복용자를 3년간 추적한 결과 복용 첫 6개월 동안 머핀·도넛 등 단 빵류 지출은 9%, 감자칩 등 짭짤한 과자 지출은 11% 줄었다. 아이스크림 지출도 5% 감소했다. 전체 식료품 지출 감소율은 5.3%였다. PwC 조사에서는 미국 복용자의 61%가 단 간식 지출을 줄였고 9%는 아예 끊었다.

패스트푸드도 타격이 크다. 코넬대 연구진에 따르면 가구원 중 1명 이상이 비만치료제를 복용하기 시작한 뒤 패스트푸드점 지출은 8% 줄었다. 복용자의 패스트푸드점 피자 지출은 22% 감소했다는 PwC 조사도 있다. 지난 2월 비만치료제를 수요 위험 요인으로 경고했던 도미노피자는 이달 발표한 7~9월 실적에서 물가 상승률을 밑도는 매출 증가율을 기록했다. 주문당 품목 수가 줄었다. 회사 측은 소비자의 경제적 부담을 원인으로 들었지만, 존 타워 씨티그룹 애널리스트는 비만치료제도 영향을 줬을 가능성이 크다고 봤다.

빅사이즈 의류 업계도 위축됐다. 토니 스프링 메이시스 CEO는 지난 9월 한 콘퍼런스에서 “플러스 사이즈 사업이 매우 부진하다”며 비만치료제의 영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활동 중인 복용자의 약 4분의 3은 옷 치수가 의미 있게 바뀌었다고 답했다. 재고관리 소프트웨어 업체 임팩트애널리틱스의 프라샨트 아그라왈 CEO는 “지난 50년간 미국인의 칼로리 섭취가 늘었는데 최근 2년 동안 줄고 있다”며 의류 치수 분포에 구조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고 진단했다. 뉴욕 맞춤 정장업체 앨런데이비드커스텀의 앨런 호로위츠 대표는 비만치료제 때문에 매출이 10~12% 줄었다고 추산했다.

◇‘적게, 하지만 더 비싸게’

기업들은 판매량 감소를 가격으로 만회하려 한다. 시장조사업체 민텔은 이런 흐름을 ‘덜 먹되 더 좋은 것을 먹는’ 소비라고 설명했다. 매그넘아이스크림컴퍼니는 한입 크기 제품과 단백질 강화 아이스크림에 주력하고 있다. 맥도날드는 단백질 볼과 구운 치킨, 에그바이트 등 고단백 메뉴를 준비 중이고, KFC는 지난달 미국에서 3.49달러(약 4600원)부터 시작하는 소용량 메뉴를 내놨다. 고단백 식품인 요거트의 미국 판매량은 지난 8월 전년 대비 6.7% 늘었다.

주류업계는 예상보다 타격이 작다. 코넬대 연구에서 복용자의 주류 지출은 첫 6개월간 1% 줄어드는 데 그쳤다. 세계 최대 증류주 업체 디아지오는 복용자의 증류주 구매가 2%, 맥주 4%, 와인 5% 감소했다고 밝혔다. 복용자의 절반 이상은 여전히 일주일에 한 번 이상 술집을 찾는다고 디아지오는 설명했다.

다만 양을 줄이고 값을 유지하는 전략은 ‘슈링크플레이션’ 논란을 부를 수 있다. 외식 컨설턴트 대니얼 앤저러는 “소비자는 양이 줄면 덜 내길 기대한다”면서도 “손님이 덜 먹는다고 임대료를 깎아주는 건물주는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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