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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의 작전적 사고는 수세적 불리에서도 공세 조건을 창출한다는 고유의 전통적 사고를 기반으로 1970년대 이후 급변하는 위협 환경과 한미연합 방위체제라는 구조적 숙명 속에서 끊임없이 진화해왔다. 특히 일련의 계속된 북한 도발 사건들을 거치며 방어적 사고에서 능동적 억제 및 통합적 공세개념으로의 도약을 이루어냈다. 궁극적으로 베트남전 이후 한국군의 작전적 사고는 북한의 위협 고도화와 한미 연합방위 구조의 심화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이러한 진화의 과정에서 한국군의 작전적 사고의 뿌리와 뼈대가 제대로 정립되지 못한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연합방위체제 구조의 심화
1978년 한미연합사령부 창설은 한국군의 모든 대규모 작전계획이 연합작전이라는 틀 내에서 설계됨을 의미하며, 한국군 작전적 사고의 핵심 변곡점이 되었다. 이는 전시 작전계획 5027(OPLAN 5027)의 기반이 되었고, 북한의 전면공격을 전방에서 저지하고 후방에서 연합전력으로 반격하는 방어적 소모전 중심의 작전개념이 확립되었다.
이 시기의 작전적 사고는 연합한 자원을 효율적으로 운용하면서 전면전 억제라는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정보·정찰·화력·항공 전력의 활용, 확고한 억제력, 동맹기반의 연합작전 수행능력 등의 장점이 있었다. 그러나 전구 작전을 설계하는 사고에서, 설계된 틀을 정확히 집행하는 사고체계로 변질되었다. 이러한 방어적 사고의 틀 속에서도 한국군은 독자적인 지형 활용방안을 모색했다.
1990년대 초 윤용남 육군참모총장이 주도한 도로견부 위주 종심방어개념은 북한군 기계화 부대의 주요 이동로를 중심으로 전투력을 집중하고, 전방과 후방을 연계하는 깊이 있는 방어선을 구축하여 지형적 특성을 활용한 효율적인 방어작전을 추구한 한국적 작전설계의 한 단면이었다.
1990년 냉전의 종식은 세계의 군사사조가 크게 변한 계기가 되었다. NATO(북대서양 조약기구)는 전면전 대비에서 위기관리, 군축, 평화유지로 무게 중심을 옮겼고 미국은 걸프전을 계기로 정밀타격과 C4ISR(지휘·통제·통신·컴퓨터·정보· 감시·정찰) 기반의 효과 중심 전쟁을 강화했다.
같은 시기 동아시아에서는 도발과 회색지대 경쟁이 반복되었다. 한국군도 이러한 흐름속에서 전면전을 대비하면서 국지도발을 상시 관리해야 하는 군대가 되었다. 경제난에 직면한 북한이 내부 결속과 대남 압박을 위해 예측 불가능한 도발을 감행하면서 한국군의 작전적 사고는 전면전 억제와 함께 ‘위기 관리와 확전방지’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1990년대 이후 한국군은 국지도발 대비개념을 체계화했고 억제 효과도 있었다.
◇교리·지휘 문화로 이어지지 않은 작전적 사고
그러나 대응 방식은 점차 비례성·확전 방지·긴장관리 중심으로 변화되었다. 이스라엘이 주변 적국의 도발에 대해 선제적·결단형 대응으로 차단해 억제를 유지했다면 한국군은 도발 이후 사태 확산을 최소화하는 관리형 대응에 집중했다. 이는 전략·정치적 측면에서 이해 가능한 선택이었지만, 지휘관이 스스로 전장을 설계하고 결심할 여지를 좁히는 방향으로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한국군이 작전적 사고를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러 사건에서 작전적 감각은 분명히 빛났다. 1·2차 연평해전에서는 제도적 시스템적 틀 안에서 전장을 재설계한 대응이 나타났고, 연평도 포격도발에서는 절차보다 효과를 우선한 판단이 이루어졌다. 강릉 무장공비 사건에서는 초기 결심의 지연은 아쉬웠지만, 이후 압축 포위·추적·봉쇄작전에서 기동감각이 살아 있었다. 반면 천안함 피격은 감지·식별·판단·대응체계가 단선적으로 작동하며, 통합된 작전적 사고체계의 부재가 드러난 안타까운 사건이었다.
1990년대 이후 한국군의 문서에는 억제, 비례 대응, 국지도발 대비, 확전 관리, 제한전 등 많은 개념이 존재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한국군이 보여주었던 작전적 사고의 틀을 계승 발전시킨 흔적은 많지 않다. 그 틀이 없거나 약화되면 작전은 효과·결심 중심에서 절차·운용 중심으로 이동하게 된다. 지난 30여 년간 한국군의 작전적 사고는 국지도발대비·억제·확전관리·연합구조 등 당대의 안보요구를 충족하는 과정에서 변화를 겪어왔다. 전술한 여러 사건마다 발휘되었던 작전적 감각과 사고가 체계·교리·교육·지휘문화로 이어져 축적되지 못했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이다.
◇능동적 억제와 압도적 응징 개념의 등장
2000년대 이후 북한이 핵무기와 미사일 등 비대칭 전력을 고도화하면서, 한국군의 작전적 사고는 기존의 수세적 방어를 넘어 공세적 주도권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근본적인 변화를 맞이했다. 기존의 방어 중심 사고로는 북한의 도발 의지를 꺾을 수 없다는 전략적 판단이 작용했다. 이로써 ‘능동적 억제(Active Deterrence)’라는 공세적 개념이 작전적 사고의 핵심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천안함 피격(2010년)과 연평도 포격 도발(2010년)은 이 능동적 억제개념을 작전적 수준에서 완성시킨 결정적 사건이다. 두 번의 도발 이후 한국군은 북한의 도발에 대해 ‘선 조치, 후 보고’ 원칙을 확립하여 현장 지휘관에게 자위권 차원의 즉각적인 반격 재량권을 부여했다. 이는 도발 인지부터 대응까지의 시간을 최소화하여 작전적 우위를 확보하려는 것이다.
한편 압도적 응징개념은 과거 비례성의 원칙에 얽매였던 경향을 탈피하고, 북한의 도발 원점은 물론 ‘지원 세력’까지 포함하여 압도적인 화력을 투사하는 ‘충분성 및 우월성’ 중심의 작전적 사고다. 이는 북한이 도발의 대가를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대응함으로써 추가 도발 의지를 원천적으로 꺾으려는 목적을 가진다.
이러한 새로운 작전적 요구를 반영하여 2015년에는 작전계획 5015(OPLAN 5015)가 발효되었는데, 이는 종전의 방어개념을 벗어나 북한의 대량살상무기(WMD)와 전쟁 지휘부에 대한 ‘개전 초기 선제타격(Preemptive Strike)’을 포함한 보다 공세적인 작전 설계를 근간으로 한다. 한마디로 5027은 전쟁을 기다리는 계획이었고 5015는 전쟁의 주도권을 선점한다는 계획이다.
한편 국지도발 대응시 연합구조와는 별개로 서북도서 방위사령부를 창설하여 복합 위협에 대한 단일 지휘체계 기반을 구축함으로써 신속한 통합 작전수행이 가능한 합동지휘체계를 강화하였다.
◇우리 군 고유의 작전적 사고 복원해야
1994년 평시 작전통제권 한국군 이양과 위기관리 시 연합사와의 협조라는 이중구조는 한국군의 능동적 억제와 압도적 응징이라는 공세적 개념이 현실에서 의사결정의 마찰과 시간지연에 부딪히게 만드는 주된 원인이었다. 그러나 연합사 개입 이전에 즉각 응징을 통한 대응의 템포 확보와 비례성을 초월한 압도적 대응을 위한 한국군 일부 장군들의 지속적인 노력은 한국군 고유의 작전적 사고가 계승되고 있다는 기대감을 증진시키고 있다.
베트남전 이후의 한국군의 작전적 사고는‘연합방위’라는 현실적 제약과 국지도발 대응이라는 실전적 경험을 거치며 위기시 템포 지연이라는 구조적 문제를 보완하기 위해 능동적 억제와 압도적 응징이라는 공세적 개념을 구체화하였다. 이는 한국군 장교단이 고도의 전문성을 통해 이 구조적 제약을 능동적으로 극복해야 함을 요구하는 강력한 정신체계이자 철학이다.
1978년 연합사 창설 이전에는 결심과 기동 중심으로 전구의 설계를 시도하였고, 연합사 창설 이후에는 설계 및 결심중심으로부터 운용중심으로 사고체계의 변화가 있었다. 1990년 이후 국지도발 위기관리시에는 확전관리, 비례대응 중심의 관리형 사고가 자리를 잡았다. 최근에는 능동적 억제 및 압도적 대응개념이 부상하고 있는데 이는 단순한 대응 강도의 확대가 아니라 한국군 고유의 공세적 작전적 사고를 복원하려는 흐름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군의 작전적 사고는 단절된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진화하고 있다. 북한의 다양한 도발 사건 때마다 작전적 감각과 사고가 부분적으로 발휘되었으나 교리, 훈련, 평가, 지휘문화 등으로 연결되지 못한 점은 아쉽다. 구조나 개념,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는 동안 작전적 사고체계를 스스로 정의하고 계승하지 못한 것이다. 한국군이 다시 강해지는 길은 새로운 작전적 사고체계를 정립하는 것이 아니라 잊어버리고 멈춰버린 한국군 고유의 작전적 사고체계를 복원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