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靑수석열전]①홍익표 정무수석...‘차이를 좁힌다’ 왕십리 장동건

정치

이데일리,

2026년 2월 14일, 오전 12:00

[이데일리 김유성 기자]이데일리는 이번 설 연휴를 맞아 청와대 수석들에 대한 소개글을 연재하고자 합니다. 그들의 일대기보다는 그들을 특징지을 수 있는 사건·사안 위주을 중심으로 구성할 예정입니다. 가까이서 본 기자의 시각이 담겨 있다는 점을 감안하고 봐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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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일도 잊는 게 인간사 일상이지만, 지금의 막강 더불어민주당도 심각한 내분과 자기반성 분위기에 휩싸인 적이 있다. 불과 3~4년 전이다. 202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 2022년 대통령선거와 지방선거까지 연이어 패배하며 민주당 안에서는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2016년 탄핵정국 이후 대선 승리, 2020년 기록적 총선 승리 이후 자만했다는 목소리였다. (곡소리만 안들렸지 초상집 분위기였다)

이때 우상호 전 정무수석이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았고 연이어 혁신위원장이 나와 패배감에 빠진 당을 구하고자 했다. 대체적인 개혁안 내용은 선당후사였다. 당내 다선 중진들에게 기득권을 내려놓으라는 촉구였지만 허공 속 메아리 같았다. 정치인 특유의 ‘말은 앞서는데 행동은 늦는’ 모습만 보일 뿐이었다.

이때 조용히 누군가 나섰다. 4선 5선까지 가능하고 자신의 정치적 고향과 같은 지역구를 내려놓고 험지 ‘서울 서초’로 간다고 선언한 이였다. 민주당 3선 홍익표였다.

홍익표는 민주당에게는 험지인 강남권의 ‘서초을’ 지역구로 지역위원장 자리를 옮겼다. 공석이 된 원래 본인의 지역위원장 자리는 정원오 성동구청장이 맡았다. 결과적이었지만 홍익표의 선택으로 전현희 의원의 원내 입성을 가능하게 됐다. 당시 무명에 가까웠던 정원오 성동구청장의 당내 입지 향상에도 도움이 됐다.

익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내표(가운데)와 의원들이 2023년 9월27일 국회에서 열린 의원총회에서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일부 ‘실행하는 반성’이 있었지만 ‘민주당 위기’라는 대세는 바뀌지 않았다. 그해 9월 이재명 당시 민주당 대표의 체포동의안이 국회에서 통과하면서 위기는 정점을 맞게 된다. 당 내분 우려까지 커졌다.

이때 홍익표가 구심점이 됐다. 체포동의안 통과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난 박광온 당시 원내대표에 이은 후임 원내대표로 선출돼 수습에 나섰다. 당 대표가 구속되면 비상대책위원회를 이끌어야 할 만큼 중차대한 위기의 순간이었다.

대통령이 운명이었을까, 이재명 당 대표는 구치소행 위기에서 벗어났다. 국회로 걸어나올 수 있게 됐다. 민주당으로서는 한숨 돌릴 수 있는 순간이었다. 당 대표가 풀려나오는 새벽녘 동료 의원들과 안도 기쁨을 나눴던 홍익표는 곧장 헝클어진 당내 분위기 수습에 들어가야 했다.

당은 이미 친명과 반명 내지 비명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 갈등은 22대총선을 앞두고 터져나왔다. 국회의원직 외에는 다른 자리가 희소할 수밖에 없는 야당의 처지에서 공천 갈등은 필연이었다. 빛이 강하면 그림자도 짙은 것일까, 이재명이라는 강력한 대선 주자를 보유한 민주당 안에서는 그에 대한 반대 목소리가 만만치 않았다.

그 사이 간극을 메우는 게 홍익표의 일이었다. 어려운 일이었다. ‘비명횡사’라는 말이 회자될 정도로 공천에 탈락한 의원들의 불만이 만만치 않았다. 일부는 독자적인 세력을 이루기 위해 민주당 밖으로 나가기도 했다. 홍익표는 10년 가까이 함께 했던 원내 동료의 이탈을 막기 위해 노심초사했다.

2024년 4월 총선에서 민주당은 역대급 승리를 거뒀지만, 원내대표 홍익표는 서초을에서 떨어졌다. 40%대 지지율을 확보했지만 상대 후보와의 간극은 컸다. ‘죽는 길이 사는 길’이라는 말이 있지만 그는 스스로 ‘죽는 길’을 선택한 셈이었다. 21대 국회 임기 종료와 함께 국회 내 자신의 근거지를 떠나야 했다. 어쩌면 그 ‘죽는 길’이 ‘86세대 청산’이라는 시대적 칼끝에서 그를 다시는 살리는 길로 이어졌을지도 모른다.

2026년초 그는 다시 이재명 대통령의 곁으로 왔다. 청와대 정무수석이다. 이번 그의 소임도 비슷하다. 당청 가교 역할을 하면서 야당과의 화합을 도모하는 일이다. 이 대통령의 국회 출신 한 참모는 “중간에서 어려운 일을 맡았다. 우상호 수석마저 어려워했다”고 말했다.

인터넷에 올라온 홍 수석의 젊었을 적 모습
참, 왕십리 장동건이라는 제목을 붙여 장동건 배우의 팬들에게 사과를 드린다. 기자의 자의적인 해석일 뿐 홍익표의 의도와는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아주길 바란다. 그의 10~20대 시절을 봤던 이들 중 일부가 ‘장동건 같았다’라고 말했다. 지금이야 환갑을 바라보는 꽃장년이 됐지만, 그때는 꽃미남이었다고 한다.

왕십리는 그의 정치적 고향이자 20~30대 시절을 보냈던 성동구·한양대의 통칭이라고 봐주시면 된다. 홍익표는 한양대 정치외교학과 학생회장이었던 1987년 87민주항쟁에 참여했다. 같은 학교 동문으로 임종석 전 대통령비서실장과는 친한 사이로 잘 알려져 있다. 임 전 실장은 1989년 3기 전대협 의장을 맡았고 학생운동계 셀럽이었다. 당시에는 서로를 잘 몰랐다고 한다.

둘이 알게 되고 친해지게 된 때는 2000년대 이후다. 87항쟁 후 정치학 석사를 받았던 홍익표는 대외정책연구원, 통일부장관 보좌관 등을 지내 외교·통일 분야 정책 수립 분야에 관여했다. 통일정책에 관심 많았던 임종석 전 실장과는 자연스러운 만남이 이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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