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이 제청 신청을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당사자가 직접 헌법소원을 제기할 수 있도록 보장한다. 이런 환경에서 확정판결 자체를 다시 심리의 대상으로 삼는 재판소원은 중복적 성격이 크다.
(자료= 대법원헌법재판소, 그래픽= 김일환 기자)
헌재는 재판소원법 도입에 따른 사건 증가 우려에 대해 “요건을 충족하지 못하는 사건은 지정재판부가 30일 이내 각하토록 돼있어 상당수 사건을 신속히 처리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패소 당사자가 원할 경우 제한 없이 재판소원 청구 자체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접수 단계의 업무 부담 증가와 심리 지연은 불가피하다. 헌재 결정 전까지 법원 판결의 효력을 정지할 수 있도록 한 개정안의 가처분 규정은 절차 지연을 위한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대법원 전경. (서울=연합뉴스)
1987년 헌법 개정과 그에 따른 1988년 헌법재판소법 제정 과정에서 법원의 재판을 헌법소원 대상에서 제외한 것은 당시의 제도적 선택이었다. 이는 법원과 헌재간 관계를 어떻게 설정한 것인지에 대한 헌법적 판단의 결과로 볼 수 있다. 만약 이와 다른 구조로 변경할 필요가 있다면 헌법 개정 논의를 통해 국민적 합의를 거치는 게 바람직하다. 사법 제도의 기본 틀을 바꾸는 문제를 단임 정부 아래 다수 여당이 일방적으로 처리해서는 안 된다.
특히 재판소원 도입에 앞서 사법부가 직면한 보다 근본적인 과제가 무엇인지 냉정하게 돌아봐야 한다. 사법개혁의 본질은 ‘옥상옥’(屋上屋)을 만드는 게 아닌, 재판 지연과 사건 적체라는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우선해야 한다. 이런 기반 정비 없이 재판소원이라는 새로운 불복 절차를 추가하는 건 권리 구제 확대라는 미명 아래 전체 사법 시스템의 혼란을 초래할 위험이 크다.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는 1·2심, 즉 사실심의 역량을 강화하는 일이다. 국민의 삶과 밀접하게 연관된 대다수 사건은 사실심에서 사실상 결론이 난다. 그러나 처리해야 할 사건이 계속 늘어는 와중에도 이를 담당할 인력은 부족해 재판 지연과 사건 적체가 심화하고 있다. 사실심에서 사실관계 파악이 충분하고 정확하게 이뤄질수록 판결에 대한 승복률이 높아지고 상고도 줄어드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이런 구조적 개선 없이 재판소원까지 도입할 경우 상급심 부담만 가중되고 전체 재판 기간은 더욱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
이를 위해서는 우수한 판사로 사실심 인력을 확충하는 게 핵심이다. 최근 판사 정원이 일부 늘었지만 증원 규모는 판사정원법에 의해 제한돼있다. 매년 발생하는 퇴직 인원을 고려하면 실질적인 증가 효과는 크지 않다.
인재들마저 로펌으로 향하면서 법관직의 매력도가 낮아지고 있는 현실이다. 경험과 전문성을 갖춘 법관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서는 이들이 법원에 남아 장기적으로 재판 업무를 수행토록 유인할 수 있는 수준의 처우 개선이 필요하다.
◇판결 중심의 분쟁해결 방식 바꿔야
‘판결 외 분쟁 해결 방식’을 확대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다. 현재 우리나라는 대부분의 법률 분쟁이 판결로 종결되고 있어 법관 개인의 업무 부담이 과도한 상황이다.
외국의 경우 나라별 차이는 있어도 대체로 하급심 사건의 약 30%가 조정이나 화해를 통해 종결되지만 우리나라는 6~8%(1심 기준)에 불과하다. 조정과 화해를 통한 분쟁 해결을 활성화하면 불필요한 항소와 상고를 억제하고 사실심 본연의 기능을 강화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상임조정위원이나 조정전담변호사 등 인적·물적 기반을 대폭 확충할 실질적인 지원을 뒷받침해야 한다.
아울러 법관의 윤리성과 책임성을 높이는 노력도 병행해야 한다. 재판 진행 방식 뿐만 아니라 법관의 일상 행위도 사법 신뢰와 직결되는 문제다. 엄격한 징계 절차와 재임용 심사를 통해 법관 스스로가 높은 책임 의식을 갖게 하는 게 사법 신뢰 회복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재판소원 도입 여부 자체는 정책적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지옥으로 가는 길은 흔히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는 말을 명심해야 한다.
대법원이 최종심이라는 우리나라 사법구조의 근간을 바꿔야 한다면 성급한 법률개정이 아니라 향후 헌법 개정 과정에서 충분한 공론을 거쳐 결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사법부의 내실화 없는 재판소원 도입은 국민에게 구제의 희망이 아닌 소송 장기화의 고통과 사회적 혼란 만을 안길 수 있다.
헌법재판소 전경. (사진= 연합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