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운영의 품격이 국가의 미래를 결정한다 [이근면의 품격 몽상]

정치

뉴스1,

2026년 3월 03일, 오전 06:30

이근면 초대 인사혁신처장(사람들연구소 이사장)

세계가 주목하는 지금, 우리는 얼마나 신뢰받는가
일론 머스크가 태극기를 16개나 마킹했다는 소식이 화제가 됐다. 세계적 빅테크 기업들이 한국의 인공지능(AI)·반도체 인력에 노골적인 구애를 보내고 있다. 글로벌 공급망 재편 속에서 한국은 핵심 거점으로 언급된다. 산업 입국의 클라이맥스가 펼쳐지는 듯하다. 세계가 인정하는 대한민국이다. 이 흐름이라면 G10을 넘어설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도 나온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변방 국가가 아닌가. 국제사회는 한국을 완전히 안정된 선진국으로 보고 있는가. 능력은 인정하지만, 여전히 조심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지는 않은가. 여기에 있는 이 미묘한 차이를 설명하는 단어가 있다. 신뢰다. 그리고 그 신뢰를 만드는 것이 바로 국가 운영의 품격이다.

대한민국은 분명 성장에 성공했다. 경제 규모, 반도체·자동차·배터리·방산 등 전략 산업의 글로벌 경쟁력, 수출입 규모로 형성된 막대한 경제적 영토, 세계 최상위권 여권 파워, 700만 명이 넘는 해외 동포 네트워크. 우리는 이미 세계 속에서 실질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나라다. 과거처럼 도움을 받는 나라가 아니라 규칙 형성에 참여하는 나라가 됐다.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와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지난해 10월 30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엔비디아 지포스 게이머 페스티벌에서 팬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다. (공동취재) © 뉴스1 김진환 기자

특히 인재 전쟁의 시대에 한국은 더 이상 수동적 위치에 있지 않다.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이 한국의 연구 인력과 엔지니어를 직접 스카우트하고, 국내 대학과 연구소에 협업을 제안하는 모습은 상징적이다. 이는 단순한 인력 수요가 아니라 한국이 기술 생태계의 중심축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다는 신호다. 그러나 동시에 이 현상은 또 다른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이 인재들을 붙잡아 둘 수 있는가. 우리는 이 산업적 모멘텀을 제도적 안정성으로 연결할 준비가 돼 있는가.

그래서 국제사회가 묻는 말은 이제 달라졌다. "얼마나 성장했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예측 가능한가?"다. 신뢰란 결국 예측 가능성이다. 법이 일관되게 작동하는가. 정책이 정권 교체와 무관하게 최소한의 연속성을 유지하는가. 시장 규칙이 갑자기 바뀌지 않는가. 권력이 절제돼 있는가. 이 기준에서 한국은 여전히 과도기적 평가를 받는다.

반복되는 정책 리셋, 누적되지 않는 국가 전략
예를 들어 보자. 연금·부동산·에너지 같은 국가 핵심 정책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방향이 크게 흔들려 왔다. 정책의 옳고 그름 이전에, 국가 전략이 누적되지 못하는 구조가 문제다. 기업은 장기 투자를 망설이고, 국민은 정책을 신뢰하지 못한다. 해외 투자자와 신용평가 기관이 한국을 평가할 때 성장률과 함께 '정책 리스크'를 언급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국제 자본은 감정보다 안정성을 선택한다.

행정의 문제도 간과할 수 없다. 신산업 인허가, 규제 완화, 재난 대응에서 "전례가 없다", "법적 책임이 우려된다"는 이유로 판단이 지연되는 장면은 반복돼 왔다. 이는 개인의 소극성이 아니라 결정을 보호하지 않는 책임 구조의 결과다. 결정하면 개인이 책임지고, 미루면 조직이 분산하는 시스템에서는 적극 행정이 뿌리내리기 어렵다.

정치 역시 갈등을 조정하기보다 증폭하는 구조로 작동한다. 타협은 배신으로, 설득은 패배로 인식되는 정치 문화 속에서 합의는 사라지고 정쟁만 남는다. 그 결과 갈등은 사법으로 넘어가고, 법원은 일상의 최종 심판자가 된다. 이는 사법의 강화가 아니라 정치의 약화다.

이처럼 성장의 속도와 운영의 안정성 사이에는 분명한 간극이 존재한다. 능력은 인정받지만, 일관성에 대한 질문이 남는 이유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운영의 품격'이 국가 경쟁력의 핵심 요소로 떠오른다.

운영의 품격은 제도로 설계된다
운영의 품격은 거창한 도덕 담론이 아니다. 그것은 신뢰를 제도화하는 작업이다.

첫째, 핵심 국가 전략을 초정권적 합의 구조로 관리해야 한다. 연금·인구·에너지·첨단 산업 같은 분야는 정권의 정책이 아니라 국가의 전략이어야 한다. 최소 10년 단위의 방향성을 법제화하고, 변경에는 엄격한 절차를 두는 방식이 필요하다.

둘째, 규제의 예측 가능성을 제도화해야 한다. 규제가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라 변경의 기준과 유예 기간, 영향 분석이 명확해야 한다. '허용 후 관리' 원칙을 분명히 하되, 규칙은 쉽게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셋째, 행정 판단 보호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합리적 절차와 전문가 의견에 기반한 정책 판단은 사후 결과와 분리해 평가해야 한다. 적극적으로 결정하는 공무원이 보호받지 못하는 국가는 결국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하는 국가로 남는다.

넷째, 시장경제 원칙의 일관성을 유지해야 한다. 정부는 경쟁을 설계하는 주체이지 경쟁의 결과를 임의로 조정하는 주체가 아니다. '선수 겸 심판' 구조를 최소화하고, 공공의 역할을 명확히 해야 한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해 11월 1일 경북 경주시 화백컨벤션센터(HICO)에서 열린 2025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마친 후 회원국 정상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오늘날 신뢰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가장 강력한 국가 자산이다. 군사력도, GDP도 중요하지만, 세계 자본과 인재가 머무는 이유는 결국 제도의 안정성과 사회의 예측 가능성 때문이다. 한국 여권의 힘도, 해외 동포의 네트워크도, 글로벌 기업의 투자도 모두 이 신뢰 위에 서 있다.

이제 우리는 선택의 지점에 서 있다. 세계는 한국을 더 이상 변방으로 보지 않는다. 그러나 완전히 안정된 핵심 국가로 분류하지도 않는다. 그 차이를 메우는 것은 더 빠른 성장률이 아니라 더 단단한 신뢰다.

이미 넓혀 놓은 세계 속 대한민국의 경제적 영토와 산업적 위상을 지키고 확장하기 위해서는 성장 이후의 운영 방식을 바꿔야 한다.

질문은 단순하다. 얼마나 더 강해질 것인가가 아니라, 얼마나 더 예측할 수 있는 나라가 될 것인가. 우리 모두에게 남겨진 숙제이자 풀어야 할 난제다. 그렇지만 우리는 할 수 있다고 스스로에게 속삭여야 한다. 그 길이 유일한 정답이고 대한민국이 G10을 넘어 진정한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길일 것이다. 아직 반환점도 저 멀리 있다.

opinion@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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