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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희상 전 국회의장은 예종석의 파워인터뷰에서 한국에서 정치가 실종됐다고 탄식했다. 정치의 본령을 회복해 상대를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사진=김태형 기자)
선거 때마다 반복되는 소란 안팎에서 문희상(81) 전 국회의장은 낮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문 전 의장은 “정치는 통합”이라며 “싸워 이기는 일이 아니다”라고 단언했다. 그의 말에는 승패를 오래 겪어본 노정치인의 체념이 아니라 정치는 사람을 다시 만나게 해야 한다는 믿음이 담겨 있었다.
문 전 의장은 한국 현대정치의 격랑을 부딪쳐온 6선 정치 원로다. 1945년 해방둥이로 태어나 서울대 법대에 진학했다. 4·19 이후 학생운동과 6·3사태의 흐름 속에서 정치적 문제의식에 눈떴다. 이후 김대중(DJ) 전 대통령과의 만남을 계기로 본격적인 정치의 길에 들어섰다.
김대중 정부에서는 대통령비서실 정무수석비서관, 국가안전기획부 기획조정실장 등을 지냈다. 노무현 정부에서는 초대 대통령 비서실장을 맡았다. 열린우리당 의장, 수차례의 비상대책위원장, 국회부의장, 국회의장을 거치며 위기 때마다 당과 국회를 수습하는 역할을 해왔다. 그는 DJ를 떠올리며 “나를 세상에서 발견해준 분”이라고 했다. 그 말을 하는 순간 그의 눈가가 잠시 촉촉해졌다.
-정치 입문 계기는.
△정치적 문제의식에 눈을 뜬 것은 스무 살 무렵, 서울대 법대에 다니던 시절이었다. 캠퍼스에는 4·19의 여운이 남아 있었고 박정희 정권 출범 이후 6·3사태가 터지면서 대학가는 격랑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처음부터 운동권에 관계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서울대 문리대를 중심으로 학생운동이 시작됐다. 문리대 학생들이 대거 연행되면서 같은 캠퍼스에 있던 법대 학생들이 자연스럽게 앞줄에 서게 됐다. 2학년이 되자 어느새 내가 학생운동의 ‘수괴’처럼 되어 있었다. 그 시절 학생운동의 핵심 주제는 ‘민족주체성 확립’이었다. 민족, 국민, 민주주의 같은 단어들이 내 세계관을 흔들었다. 공부는 거의 하지 못했다. 밤낮으로 데모와 토론 속에 살았다. 돌아보면 그 시간이 내 성향을 정치적으로 바꿔놓은 출발점이었다. 하지만 곧바로 정치의 길로 들어선 것은 아니었다. 군 복무를 마친 뒤 고향 의정부로 내려가 서점을 열었다. 정치는 잊고 책과 사람들 속에서 조용히 살아보려 했다. 그런데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세상을 떠나면서 내 삶에도 다시 변화가 찾아왔다.
-구체적으로 어떤 변화였나.
△10·26사태 이후 나는 다시 정치의 문 앞에 서게 됐다. 그전까지는 의정부에서 서점을 하며 살고 있었다. 사실 그때까지 내 이름은 문정흥이었다. 문희상이라는 지금의 이름은 1973년 서점을 시작하면서 개명한 이름이다. 어머니께서 작명가에게 ‘돈을 잘 벌 이름으로 지어달라’고 하셨고 그렇게 받은 이름이 문희상이었다. 예전 이름인 정흥은 잊지 않으려고 지금도 호로 쓰고 있다.
서점은 잘됐다. 당시 경기북부 지역은 출판계에서 크게 주목받는 곳이 아니었는데 내가 전력투구하자 상황이 달라졌다. 책을 1만권 찍어 내면 그중 100권은 우리 서점으로 올 정도였다. 그렇게 정치를 잊고 살던 중 김영삼 전 대통령(YS), DJ 측근으로 있던 친한 선배들에게서 연락이 왔다. 박정희 대통령이 세상을 떠났으니 새로운 민주주의 시대가 열릴 것이라며 빨리 서울로 올라오라는 제안이었다. 가장 먼저 YS를 찾아갔다. 평생 함께 정치할 어른을 뵈러 간다는 비장한 각오였다. 그런데 조찬을 하며 대화를 나누는 동안 기대와는 조금 달랐다. 논리적으로 설득된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솔직히 당황했다.
이후 DJ를 뵈러 갔다. 원래는 15분 면담이었다. 그런데 나를 보시더니 다른 방으로 데려가셨고 내가 관심을 갖고 있던 통일 문제를 놓고 말씀을 이어갔다. 당시 통일은 뜨겁고 낭만적인 구호처럼 쓰이던 말이었다. 그런데 DJ는 통일을 ‘감정’이 아니라 ‘논리’로 설명했다. 먼저 평화적으로 공존하고, 교류와 협력으로 신뢰를 쌓고, 그다음 평화적 통일로 가야 한다는 구상이었다. 이른바 3단계 통일론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완전히 설복됐다. 그 순간 큰절을 하며 앞으로 평생 모시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렇게 처음 만난 날 DJ는 나에게 민주연합청년동지회, 이른바 ‘연청’ 전국 조직을 맡아보라고 했다. 나는 전국을 돌며 30만명의 조직으로 키워냈다. 그렇게 내 정치 인생이 시작됐다.
문 전 의장은 좋은 지도자에 대해 "상대를 존중해야 한다. 상대를 이해하려고 해야 한다. 앞을 내다보고 길을 닦아주는 사람이 좋은 지도자"라고 말했다. (사진=김태형 기자)
△흔히 DJ를 진보의 상징처럼 말하지만 가까이에서 본 DJ는 오히려 ‘진짜 보수’에 가까운 분이었다. 나 역시 스스로 보수라고 생각한다. 내가 말하는 보수는 단순히 반공 구호를 외치는 것이 아니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지키는 것, 그리고 자유와 평등, 평화의 가치를 지켜내는 것이 보수의 본질이다. 그런 기준에서 DJ는 누구보다 그 가치를 철저히 지킨 정치인이었다. 나는 보수를 반공이라는 말 하나로 좁혀 보는 시각에 반대한다. 가까이에서 본 DJ는 소위 ‘빨갱이’가 아니었다. 오히려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이 누구보다 투철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를 향한 색깔론이 너무 억울했다. 그 억울함을 바로잡고 싶었다. 보수적 지역인 의정부에서 자란 내가 동교동계에서 정치를 시작한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DJ에게 특별한 신임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많이 사랑받았다. DJ는 나를 처음 봤을 때 “원석을 본 기분”이라고 했다. 그는 “너는 원석이야. 빛날 수 있어”라는 말씀을 자주 해주셨다. 그만큼 나를 믿어주신 것이다. 특히 청년조직처럼 어렵고 민감한 일을 맡기면서도 권한을 전적으로 주셨다. 그래서 정말 죽어라고 뛰었다. 이후 김대중 정부에서도 중요한 자리들을 맡게 됐다. 하지만 내게 더 크게 남은 것은 직책 자체보다 그 자리를 맡기기까지의 신뢰였다. 나는 이렇게 말하곤 한다. 나를 낳아주신 분은 부모님이지만, 나를 세상에 발견해 준 분은 DJ라고. 그분은 내 정치 인생에서 스승이자 또 다른 의미의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 국회의원이 처음 됐을 때도 잊지 못한다. 평화민주당 후보로 경기 북부에서 처음에는 떨어졌고 두 번째 도전 끝에 당선됐다. 그 뒤 아내와 함께 DJ를 찾아갔다. 그때 그는 “나하고 약속할 수 있어?”라고 물었다. 국회의원으로서 참석해야 할 모든 행사와 회의, 본회의와 상임위에 한 번도 빠지지 말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러겠다고 했다. 초·중·고를 모두 개근한 사람이라 이상하게 들리지 않았다. 이후 다선 의원이 되면서 국회 회의에 빠지는 일이 정치권에서는 별일 아닌 것처럼 여겨지는 분위기도 겪어봤다. 누가 뭐라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는 외국 출장처럼 사유서를 내야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회의에 빠진 적이 없다. 후배들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였다고 말하면 거짓말이다. 김대중 대통령과의 약속 때문이었다. 내게는 아버지와의 약속이나 마찬가지였다.
-정치적 고비마다 중책을 맡게 된 이유가 무엇이었나.
△복이 많았다. 그런데 가만히 돌아보면 내가 맡은 자리는 대부분 어려울 때의 자리였다. 할 사람이 없거나, 내가 가지 않으면 안 되는 자리였다. 비상대책위원장도 여러 차례 맡았다. 당이 거의 망가져 다시 일어설 수 없을 것 같을 때, 서로 갈라져 쳐다보지도 않을 때였다. 그때 “그래도 한데 묶을 수 있는 사람은 문희상 아니냐”라는 말이 나왔다. 가만히 있다가 저절로 간 자리가 아니었다. 그렇게 갈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간 것이다. 그때는 그것이 내 소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역할을 맡을 수 있었던 이유는.
△아마도 내가 상대를 적으로만 보지 않으려 했기 때문일 것이다. 정치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이분법적 사고다. 우리 민족은 오랫동안 이분법에 익숙했다. 독재냐 반독재냐, 군부냐 민주냐, 늘 상대와 싸워 이겨야만 하는 정치가 이어졌다. 그러나 정치는 본래 통합이다. 논어에서 말하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이다. 서로 다르지만 함께 가는 것, 다름을 인정하면서도 공동체를 무너뜨리지 않는 것이 정치의 본질이다. 싸워서 이기고 쟁취하는 방식만으로는 영원히 ‘선공후사’(先公後私)가 될 수 없다. 개인의 이익보다 공익을 앞세우려면 결국 함께 가는 논리가 필요하다. 지금 한국 정치의 핵심 문제는 정치가 실종됐다는 데 있다. 민주주의는 모두를 함께 아우르는 것이다. 무너진 정치를 복원하려면 결국 통합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 출발점은 법치주의, 견제와 균형, 삼권분립이다. 헌법이 만든 기본 원리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이것이 회복되지 않으면 한국 정치는 계속 같은 갈등의 연장선 위에 머물 수밖에 없다.
-6선 원로 정치인으로서 잊을 수 없는 순간은.
△단연 DJ의 수평적 정권교체 성공이다. 그분 개인사로 보면 네 번째 도전 끝에 이뤄낸 승리였다. 또 도전하고, 또 도전하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아 결국 이룬 것이다. 물론 그분의 노력만으로 된 일은 아니었다. 하늘의 뜻도 있었다고 본다. 당시 이인제 후보가 등장해 적지 않은 표를 가져갔고 지역연합과 이념연합도 이뤄냈다. 그것이 통합의 정치였다. DJ가 당선되면서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여야가 선거를 통해 정권을 주고받는 수평적 정권교체가 이뤄졌다. 그때 비로소 한국 민주주의가 본격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했다고 본다. 나에게도 그 순간은 정치 인생의 정점이었다. ‘이제 정치가 회복됐다. 나는 할 일을 다했다. 지금 죽어도 한이 없다’는 생각까지 했다. 그 뒤로는 덤으로 사는 인생이라고 생각했다. 김대중 대통령의 집권이야말로 내 인생이 가장 꽃피웠던 순간이었다.
-그런 역사적 장면을 겪은 입장에서 요즘 정치는 어떻게 보나.
△지금은 정치가 실종됐다. 정치의 본령은 통합이다. 배고픈 사람을 배부르게 하고 등 시린 사람의 등을 따뜻하게 해주고 억울한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것. 그것이 정치가 있어야 하는 이유다. 국가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공자 말씀에도 그런 대목이 있다. 정치의 요체가 무엇이냐고 묻자, 공자는 식량, 군사, 신뢰를 말했다. 지금 말로 하면 경제, 안보, 그리고 국민의 신뢰다. 그중 부득이 하나를 버려야 한다면 먼저 군사를 버리고 또 하나를 버려야 한다면 식량을 버리겠다고 했다. 끝까지 남겨야 할 것은 신뢰라고 했다. 공동체 안에 신뢰가 없으면 국가가 설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지금 정치는 그 신뢰를 잃고 있다. 싸워서 이기려고만 하고 이긴 쪽이 모든 것을 가져가는 승자독식의 정치가 반복되고 있다. 상대를 깔아뭉개고 무시하는 정치가 계속되고 있다. 이것은 단순한 정쟁의 문제가 아니다. 민주주의의 기본이 흔들리는 문제다.
-동교동계 정치인으로서는 이례적으로 ‘보통사람들의시대 노태우센터’ 고문을 맡고 있다.
△나는 노태우 대통령을 단순히 미워해야 할 대상으로만 보지 않는다. 물론 군부 권위주의 시대에 맞서 싸워야 했던 시기가 있었다. 그러나 6공화국이 출범한 뒤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노태우 대통령이 당선됐고, 1988년 총선 이후 국회는 여소야대가 됐다. 그때 제1야당을 이끌던 DJ는 무조건 반대만 하지 않았다. 중요한 국가적 의제에서는 협력했다. 그 시기에 남북기본합의서가 만들어졌고 소련·중국과의 수교로 이어진 북방외교도 추진됐다. 여당은 추진하고 야당도 필요한 부분은 밀어줬다. 서로 생각은 달랐지만 대화하고 숙의를 통해 협력했다. 나는 그것이 정치의 중요한 모델이었다고 본다. 내가 노태우센터 고문을 맡은 것도 그런 맥락이다. 노태우 정부 시기의 모든 것을 긍정한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그 시기에 있었던 대화와 협력의 경험, 남북관계와 북방외교의 성과는 오늘의 정치가 다시 돌아봐야 할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좋은 정치인이 갖춰야 할 자질은 무엇인가.
△정치인은 폼만 잡아서는 안 된다. 힘만 과시해서도 안 된다. 공부해야 한다. 사안의 핵심이 무엇인지, 급소가 어디인지, 최선의 방책이 무엇인지 빨리 찾아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실적으로 보여줘야 한다.
-한때 당이 다른 유승민 전 의원을 ‘대통령감’이라고 평가한 적이 있다.
△진영이 달라도 평가할 것은 해야 한다. 유승민 전 의원은 지성을 갖춘 사람이다. 많이 알고 실력도 있다. 논리가 정확하고 사안의 핵심을 빨리 짚는다. 비판하기에 앞서 대안을 제시하는 정치인이다. 경제와 안보는 정치의 기본이다. 경제는 국민의 삶이고 안보는 국가의 안전이다. 그것이 제대로 돼야 국민의 신뢰가 시작된다. 안보를 말한다고 해서 다 나쁜 것은 아니다. 다만 안보가 극단적 구호로만 흐르면 위험하다. 중요한 것은 논리와 대안이다. 반대를 위한 반대만 해서는 안 된다. 위세로 상대를 제압하려는 것도 좋은 정치가 아니다. 국회에 나온 공무원들을 상대로 소리만 지르는 사람은 실력 있는 정치인이 아니다. 국회의원은 상대를 존중해야 한다. 앞을 내다보고 길을 닦아주는 사람이 좋은 지도자다.
-후배 정치인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정치의 본령으로 돌아가야 한다. 정치는 함께하는 것이고, 더불어 가는 것이고, 같이 하는 것이다. 힘으로 눌러 승복시키는 것은 정치가 아니라 독재다. 상대를 굴복시키려는 것도 독재다. 민주주의는 상대를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생각이 다르고 부족한 점이 있더라도 같이 가야 한다. 상대를 없애야 할 적으로 보는 순간 정치는 무너진다. DJ식으로 표현하자면 정치는 국민보다 반 발 앞서가야 한다. 앞장서서 나서되 국민과 너무 멀어지면 안 된다. 한 발만 앞서가도 국민과 동떨어질 수 있다. 국민과 함께 호흡하면서 조금 앞에서 길을 여는 것, 그것이 정치인의 역할이다. 후배 정치인들에게 꼭 말하고 싶은 것도 결국 김대중 정신이다. 자나 깨나 그분이 하신 말씀이 있다. 더불어 함께 가라는 것이다. 그것이 정치다.
문희상 전 국회의장이 예종석 명예대기자와 함께 인터뷰하며 활짝 미소짓고 있다. (사진=김태형 기자)
△1945년 경기 의정부 △경복고 △서울대 법대 △제14·16·17·18·19·20대 국회의원 △김대중 정부 대통령비서실 정무수석비서관 △국가정보원 기획조정실장 △노무현 정부 초대 대통령비서실장 △열린우리당 의장 △민주통합당·새정치민주연합 비상대책위원장 △국회부의장 △국회의장 △김대중재단 상임 부이사장 △보통사람들의시대 노태우센터 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