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멱칼럼]절차적 정의 훼손하는 산업안전 행정 우려스럽다

정치

이데일리,

2026년 8월 12일, 오전 05:03

정진우 서울과기대 교수
[정진우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안전공학과 교수] 셰익스피어 이후 최고의 극작가로 평가받는 버나드 쇼는 “진보란 폭력적인 방법이 아무리 효과적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거부하는 데 달려 있다”고 했다. ‘정의론’으로 유명한 정치철학자 존 롤스는 결과에 승복하기 위한 조건으로 절차적 정의를 꼽았다. 둘 다 목표 달성을 위해 부당한 방법을 쓰거나 절차를 도외시하는 결과주의를 배격하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산업안전 행정에선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정의롭지 못한 방법이 안이하게 채택되고 있어 많은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중대재해가 발생하면 재해 원인을 규명하기도 전에 특정 업체가 법 위반을 한 것으로 단정 짓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예다. 산업안전에는 원청사, 하청사(사업주), 발주자, 제조자, 대여자, 노동자 등 여러 주체가 관련돼 있다. 누가 잘못했는지는 조사를 해봐야 알 수 있는데도 조사하기도 전에 원청사 책임으로 전제하고 ‘답정너’ 수사를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공권력 행사가 ‘법률’이 아닌 ‘국민정서법’에 따라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이는 의무주체의 권한과 역할에 맞는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안전원리와도 배치된다.

중대재해가 발생하기만 하면 잘못의 정도를 묻지 않고 엄한 제재를 당연시하는 건 책임원칙에 반하는 결과책임를 묻는 처사다. 죄를 저질렀어도 죄질과 책임에 상응하는 제재를 하는 것이 엄연한 헌법원칙인데도 산업안전 영역에선 중대재해가 발생한 경우 이 원칙에 눈감고 여론을 의식한 융탄폭격성 제재를 내리곤 한다. 산업안전 제재 강도에서 우리나라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처벌의 나라라고 불리는 싱가포르보다도 제재가 훨씬 강하다.

귀책사유가 있는지 없는지 따지지 않고 중대재해 발생만으로 책임을 추궁하는 관행도 절차적 정의에 반한다. 고의나 과실이 요구되는데도 이를 도외시하고 제재하는 비상식적인 일이 버젓이 발생하고 있다. 입찰 제한과 같은 행정제재에서 특히 심하다. 헌법원칙인 자기책임의 원칙에 위배되는 일이자 형벌권과 행정권의 남용이다.

효율성과 기회비용을 생각지 않고 행정자원을 크게 늘렸지만 행정의 질은 퇴행하고 있다는 비판이 자자하다. 충분한 사전 검토와 실질적 의견수렴과 같은 절차적 정당성 결여로 방향성이 잘못 설정된 탓이다. 방향이 잘못되면 조직, 인력, 예산 확대가 문제를 되레 악화시키는 법이다. 행정자원이 선진국의 3~10배에 이를 정도로 비대해졌는데도 선진국과의 행정역량 격차가 더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올해 들어와 건설 사망사고가 감소한 건 수주는 증가했지만 취업자 수가 26개월째 감소하고 대형업체에 수주가 쏠리면서 재해에 취약한 중소업체 수주가 축소된 데 기인하는 측면이 크다. 감독인력이 50% 이상 늘고 재해가 다발하는 제조업 취업자 수가 24개월째 감소한 것까지 고려하면 사망사고가 10% 정도 감소한 것을 놓고 정책 효과라는 주장은 궁색하다.

전문가와 주무부처도 이해·판단하기 어렵고 산업안전관계법(산업안전보건법, 중대재해처벌법, 파견법, 일명 노란봉투법) 간에 모순되는 규정을 만들어 놓고 이를 지키지 않는다는 이유로 처벌하는 건 권위주의 국가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다. 예측하기도 이행하기도 어려운 법으로 제재를 일삼는 것이야말로 불공정의 전형이 아닐까. 불공정한 규칙으론 공권력 갑질의 도구가 될 뿐 중대재해 감소 성과는 거두기 어렵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는 순간 절차적 정의를 요구하는 법치주의는 형해화된다. 노동자 안전을 대의명분으로 삼더라도 절차적 정의를 도외시하는 건 그 자체로 정의를 훼손하고 수많은 부작용을 낳는다는 것이 역사적 교훈이다. 진보를 표방하는 정부가 불의한 방법에 쉽게 기대는 건 진보를 욕되게 하는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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