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교착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란 전쟁의 출구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성과가 급해진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을 끌어내기 위해 한미연합훈련 축소에 이어 대북제재 완화, 더 나아가 북핵 인정까지 나아가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만만찮다. 이 경우 한국과 일본을 중심으로 자체 핵무장론이 다시 번지며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핵 도미노’ 우려가 커질 수 있다. ‘전쟁을 일으킨 대통령’의 이미지를 털고 ‘한반도 평화의 중재자’를 자처하려는 트럼프 대통령의 ‘위험한 거래’가 본격화하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왼쪽)이 집권 1기 시절인 2019년 6월 판문점에서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만나 악수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김여정 부장은 19일 밤 트럼프 대통령의 ‘연내 김정은과 만날 것’이라는 발언과 관련해 “나는 전혀 알지 못하는 일”이라며 “우리 최고지도부의 대외정책과 관련해 내가 알지 못하고 있는 유일한 사안일 것”이라고 밝혔다. 다만 “두 지도자의 관계는 의연 훌륭하다. 이는 세상이 다 알고 있다”며 정상회담 가능성 자체는 닫지 않았다. 대화의 문은 열어두되 먼저 움직일 이유는 없다는 식이다.
김 부장의 발표 약 두 시간 뒤 트럼프 대통령은 다시 김 위원장과의 회동 의지를 밝혔다. 특히 “그는 57개의 매우 강력한 핵무기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북한의 핵능력을 구체적인 숫자로 직접 언급한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은 단순한 숫자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안규백 국방부 장관은 20일 국회에서 북한이 보유한 핵탄두를 약 80~120개로 추정한다고 밝혔다. 추정치는 엇갈리지만 미국 대통령이 북한의 핵능력을 이미 존재하는 현실로 전제하고 공개적으로 언급했다는 점은 과거와 달라진 대목이다.
트럼프 1기 당시 북미 협상의 간판은 ‘완전한 비핵화’였다. 하지만 북한의 핵능력이 크게 고도화된 만큼 이번에는 핵물질 생산과 핵·미사일 프로그램을 우선 멈춰 세운 뒤 단계적으로 감축하는 현실적 접근이 부상할 가능성이 있다.
한국 정부 역시 당장 북한 핵을 한꺼번에 없애기보다 우선 중단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입장이다. 정부는 북핵 문제를 ‘중단→축소→폐기’의 3단계로 풀어가겠다는 구상을 유지하고 있다. 통일부는 트럼프 대통령의 ‘57개 핵무기’ 언급도 북한 핵위협의 엄중성을 강조하며 핵프로그램을 우선 멈추게 하려는 취지로 해석하고 있다.
다만 이를 미국이 북한을 공식 핵보유국으로 인정하거나 군축협상으로 방향을 틀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정부 역시 장기적인 목표는 여전히 ‘핵 없는 한반도’라고 선을 긋고 있다.
문제는 실제 북미 협상에서 어디까지 줄이느냐다. 미국이 본토를 위협하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과 장거리 핵전력 감축에 우선순위를 두고 한국을 직접 겨냥하는 전술핵이나 단거리 미사일 문제를 뒤로 미룰 경우 서울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스몰딜’이 될 수 있다. 한국 내 자체 핵무장론이 다시 힘을 받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中도 “美가 먼저 바꿔라”…김정은에 더 유리해진 판
중국의 움직임도 김정은의 협상력을 높이는 변수다. 왕이 중국 외교부장은 19일 조현 외교부 장관과 회담한 뒤 북미 정상회담 중재 가능성에 대해 “북한과 미국 사이에 결정할 일”이라면서도 “특히 미국은 오랫동안 유지해온 대북 적대정책을 바꿔야 한다”고 밝혔다. 북미 대화 재개의 공을 미국 쪽으로 넘기며 북한의 기존 주장에 힘을 실어준 셈이다.
왕 부장은 한반도 평화와 안정을 위해 중국이 “건설적인 역할”을 하겠다는 입장도 밝혔다. 하지만 북한을 설득하기보다 미국의 태도 변화가 먼저라는 기존 입장을 유지했다. 이 대통령이 광복절 경축사에서 ‘전쟁 종식을 위한 당사자 간 논의’를 제안한 만큼 북미대화 재개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과정에서 중국이 어떤 역할을 할지, 또 북한에 어떤 메시지를 낼지가 주목된다.
북러 밀착도 북한의 조급함을 낮추는 요인이다. 러시아와의 군사·경제 협력이 강화되고 중국까지 미국의 정책 변화를 요구하는 상황에서 북한으로선 당장 워싱턴의 제안에 매달릴 이유가 크지 않다.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북한은 트럼프 대통령이 외교적 돌파구가 급하다는 것을 꿰뚫어보고 있다”며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에는 안보 비용을 더 부담시키면서 북한에는 핵보유라는 지위를 사실상 인정하는 듯한 신호를 보내 자신의 정치적·실리적 이익을 극대화하려 하고 있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