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HN 홍동희 선임기자) '이무생로랑'. 배우 이무생에게 붙은 이 별명은 그가 가진 젠틀하고 지적인 이미지를 대변한다. 명품 수트가 잘 어울리는 단정한 남자. 하지만 지난 7일 공개된 넷플릭스 시리즈 '당신이 죽였다' 속 그는 낯설다. 헝클어진 장발, 투박한 금목걸이, 속을 알 수 없는 눈빛. 우리가 알던 이무생은 그곳에 없었다. 대신 과거의 시간에 갇혀버린 남자 '진소백'만이 서 있었다.
20일 서울 용산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이무생은 "작품을 다 보고 나서 10분 동안 멍하니 있었다"고 털어놨다. 단순히 자신의 연기를 모니터링하는 차원이 아니었다. 폭력과 방관, 그리고 구원이라는 묵직한 화두 앞에 배우이기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압도되었기 때문이다. 공개 2주 만에 넷플릭스 비영어권 TV 부문 글로벌 1위를 질주하고 있는 이 화제작의 중심에서, 이무생이 그려낸 '진소백'의 세계를 들여다봤다.
'모호함'의 미학, 그리고 장발
진소백은 대형 식자재상 '진강상회'의 대표이자, 가정 폭력의 지옥에서 탈출하려는 은수(전소니 분)와 희수(이유미 분)를 돕는 조력자다. 하지만 첫 등장의 그는 선인지 악인지 구분할 수 없는 '경계인'이다.
이무생은 진소백을 관통하는 키워드로 '오묘함'과 '모호함'을 꼽았다.
"진소백은 그 누구도 자신의 내면에 들이지 않는, 닫힌 사람이었어요. 감독님과 상의 끝에 탄생한 장발 스타일링도 멋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저 삶에 무심한 거죠. 머리를 감고 툭 털고 나온 듯한, 샴푸가 많이 드는 그 머리카락이 진소백의 정체된 시간을 보여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의도대로 시청자들은 초반부 진소백을 악역으로 의심했다. 이는 전작들에서 보여준 그의 다채로운 잔상 때문일지도 모른다. 드라마 '부부의 세계'에서는 지고지순한 순정남으로 '국민 섭섭남'의 오명을 벗겨줄 듯한 젠틀함을 보여줬지만, '더 글로리'에서는 교도소 철창 너머로 섬뜩한 미소를 짓던 사이코패스 살인마로 분해 대중에게 충격을 안겼다. 이무생은 이처럼 극과 극을 오가는 '온도차'가 확실한 배우다.
"의도된 반전이었습니다. 카라를 내린 셔츠에 금목걸이, 그리고 장발. 어딘가 내출혈(內出血)을 일으키고 있는 듯한 오묘한 지점을 찾고 싶었어요.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속은 썩어들어가고 있는 남자의 형상이죠."
'이무생로랑'을 넘어선 연기의 진폭
사실 이무생의 필모그래피는 '성실한 변주'의 기록이다. 2006년 영화 '방과후 옥상'으로 데뷔한 그는 오랜 무명 시절을 거치며 단단한 내공을 쌓았다. '슬기로운 감빵생활'의 변호사, '봄밤'의 무책임한 남편 등 조연 시절에도 그는 늘 맡은 배역 이상의 존재감을 발휘했다. 특히 '부부의 세계'를 기점으로 폭발한 그의 잠재력은, '마에스트라'의 집착남 유정재를 거쳐 이번 '당신이 죽였다'의 진소백에 이르러 정점에 달했다.
평단은 그를 두고 "눈빛으로 서사를 쓰는 배우"라고 평한다. 진소백이 별다른 대사 없이 은수를 바라보는 시선 하나만으로도, 그가 겪어온 고단한 세월과 은수에게 느끼는 연민을 동시에 표현해내는 힘. 그것은 이무생이 철저한 계산과 본능적인 감각 사이에서 줄타기하며 빚어낸 결과물이다. 이번 작품에서 그는 특유의 정확한 딕션을 잠시 내려놓고, 툭툭 던지는 듯한 화법과 거친 호흡으로 '진소백'이라는 야수의 질감을 완성했다.
멈춘 시간, 그리고 상처의 공명
극 중 진소백은 백화점 시계 매장에서 은수와 조우한다. 이무생은 진소백을 "멈춰 있는 시계"에 비유했다. 과거 아들을 잃은 트라우마 속에 갇혀, 물리적인 시간은 흐르되 심리적인 시간은 정지된 남자. 그런 그가 왜 위험을 무릅쓰고 두 여자의 살인 공모를 돕게 되었을까.
"상처 입은 자가 상처 입은 자를 알아본다고 하죠. 은수와 희수를 보며 제 과거의 아픔이 '트리거'가 되어 반응한 겁니다. 논리적인 이유보다는 본능적인 '동질감'이었어요. 그들을 돕는 행위는 결국 진소백 자신을 구원하는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이 내 울타리 안에 들어옴으로써, 멈췄던 제 시계바늘도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거죠."
이무생은 진소백을 전형적인 '백마 탄 왕자'나 '해결사'로 그리지 않았다. 그는 한 발짝 뒤에서 지켜보는 '울타리'를 자처했다.
"누군가 전면에 나서서 끌고 가는 리더십도 필요하지만, 진소백은 옆에서 보듬어주고 안전한 경계를 만들어주는 사람이길 바랐습니다. 제가 가정이 있고 아이를 키우다 보니, 현실적인 '어른'의 역할이란 바로 그런 안정감을 주는 것이 아닐까 싶더군요."
디테일의 승부사: 마작패 소리와 떨리는 손
이무생의 연기는 디테일에서 빛을 발한다. 그가 항상 손에 쥐고 다니는 마작패가 대표적이다. 이는 대본에 없던 이무생의 아이디어였다.
"마작 연습을 하다가 우연히 새 두 마리가 그려진 패를 봤어요. 마치 은수와 희수 같더군요. 그 패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자갈자갈' 소리를 냈습니다. 불안할 때, 결단이 필요할 때 내는 그 소리가 나중에는 희수에게 '나 여기 있다'는 위로의 신호가 되기도 하죠."
극 후반, 희수에게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칼을 건네줄 때 미세하게 떨리던 손 역시 철저한 계산의 결과다.
"아들 이야기만 나오면 트라우마로 손이 떨린다는 설정을 뒀습니다. 칼을 건네는 건 살인을 종용하는 게 아닙니다. '나는 갈 수 없으니 내 분신이 너희를 지켜줬으면 좋겠다'는 간절함이죠. 그 떨림은 두려움이자, 동시에 사랑이었습니다."
또한, 화제가 된 중국어 연기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는 "입이 뇌가 된 것처럼 툭 치면 나올 정도로 연습했다"고 밝혔다. 특히 은수에게 던지는 "토 달지 마"라는 대사를 현장에서 직접 중국어로 바꾸자고 제안했다.
"은수가 중국어를 알아듣는다는 설정이니까, 남들은 못 알아듣게 우리끼리만 통하는 언어로 말하고 싶었어요. 그래야 그 경고가 은수의 가슴에 더 비수처럼 꽂힐 테니까요."
천군만마(千軍萬馬)와 같은 배우들, 그리고 '당신'의 의미
인터뷰 내내 그는 동료 배우들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전소니를 보며 "흔들리지만 부러지지 않는 단단함에 오히려 영감을 받았다"고 했고, 가정 폭력 피해자를 연기하며 감정 소모가 컸을 이유미에 대해서는 "온/오프가 확실한 프로페셔널함에 존경심을 느꼈다"고 전했다. 1인 2역을 소화한 장승조에게는 "악역의 고독함을 알기에 말없이 어깨를 두드려주는 것만으로도 통했다"며 애틋함을 드러냈다.
드라마의 제목 '당신이 죽였다'는 중의적이다. 여기서 '당신'은 살인자일 수도, 혹은 그 폭력을 방관한 우리 사회일 수도 있다.
"전편을 보고 나서 '말잇못(말을 잇지 못함)' 상태가 됐어요. 비록 극 중 사건은 해결됐지만, 가정 폭력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화두잖아요. 제목이 주는 무게감이 상당했습니다. 결국 해결은 '나'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걸 느꼈습니다. 방관자가 되지 않는 것, 깨어있는 시선으로 주변을 바라보는 것. 그것이 진소백이 남긴 메시지가 아닐까요."
에필로그: 다시 흐르는 시간
마지막 회, 모든 사건이 끝나고 진소백은 짧아진 머리로 등장한다. 담배 대신 껌을 씹으며. 이무생은 이를 "새로운 삶의 시작"이라고 정의했다.
"은수와 희수가 지나가는 말로 '머리 좀 자르는 게 어때요?'라고 툭 던졌을지도 모릅니다. 예전 같으면 무시했겠지만, 이제는 타인의 말에 반응하고 변화할 준비가 된 거죠. 그 작지만 큰 변화가 진소백에게는 구원이었습니다."
배우 이무생은 이번 작품을 통해 자신의 스펙트럼을 또 한 번 확장했다. '이무생로랑'이라는 편안한 수식어에 안주하지 않고, 기꺼이 헝클어지고 망가지며 인간의 심연을 들여다봤다. 순정남에서 사이코패스로, 다시 거친 야수로. 그가 보여준 진소백은 완벽한 영웅은 아니었지만, 그렇기에 더욱 현실적인 위로로 다가왔다. 상처 입은 자들을 위한 가장 투박하고도 따뜻한 울타리. 이무생의 시간은, 그리고 그의 연기는 지금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사진=MHN DB, 넷플릭스, 에일리언컴퍼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