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메이크업 인질과 '무빙' 조인성… '휴민트' 볼수록 '베를린'이 위대한 이유 [M픽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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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HN스포츠,

2026년 2월 23일, 오전 11:30

(MHN 홍동희 선임기자) 류승완 감독의 신작 '휴민트' 극장 문을 나서며 드는 생각은 얄궂게도 하나였다. '아, 13년 전 개봉했던 '베를린'이 진짜 어마어마한 명작이었구나.'

혹한의 도시 블라디보스토크를 배경으로 남북한 비밀 요원들의 격돌을 그린 '휴민트'는 류승완 감독이 스스로 공표한 '베를린' 세계관의 연장선이자 야심작이다. 첩보 액션이라는 화려한 밥상을 차렸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입안을 맴도는 건 진한 고기 맛이 아니라 조미료 맛이다. 눈은 즐겁지만 가슴은 뛰지 않는다. 역설적이게도 '휴민트'의 화려한 겉모습은, 차갑고 묵직했던 과거 '베를린'의 완벽함을 끊임없이 소환해 낸다.

물론 류승완 감독이 가장 잘하는 '액션'만큼은 물이 올랐다. 라트비아 로케이션으로 담아낸 차가운 풍경 속에서 펼쳐지는 타격감은 여전히 매섭다.

특히 칭찬할 만한 대목은 빛과 소리를 영리하게 활용한 전술 액션이다. 어두운 폐쇄 공간에서 형광등을 쏴 조도를 조절하고, 자동차 전조등으로 상대의 시야를 가리며 싸우는 장면들은 류승완표 액션이 도달한 새로운 경지를 보여준다. 후반부 약 20분간 대사 한마디 없이 오직 액션과 숨소리만으로 밀어붙이는 시퀀스는, 액션 장인만이 부릴 수 있는 순수한 영화적 마법이다.

 

문제는 화려한 액션을 받쳐줘야 할 인물들의 이야기다. 국정원 블랙 요원 '조 과장' 역을 맡은 조인성은 냉철하고 노련한 첩보원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치명적인 기시감을 안긴다. 디즈니+ '무빙'에서 하늘을 날던 블랙 요원 '김두식'의 그림자가 너무 짙게 배어 있는 탓이다. 게다가 영화는 그가 왜 정보원을 위해 목숨까지 거는지 친절하게 설명해주지 않는다. '베를린'의 표종성(하정우 분)이 무너져가는 체제와 아내 사이에서 처절하게 몸부림치며 관객의 숨통을 조였던 것과 비교하면, 조 과장의 발걸음은 너무 가볍다.

북한 국가보위성 조장 역의 박정민 역시 '연기 천재'라는 수식어에 걸맞게 고군분투한다. 냉혹한 카리스마부터 옛 연인을 향한 절절한 순애보까지 쏟아내지만, 냉혈한 요원이 갑자기 사랑꾼으로 돌변하는 과정이 다소 억지스럽다. 배우의 연기력이 대본의 헐거운 이음새를 억지로 메우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영화  '베를린'. CJ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  '베를린'. CJ엔터테인먼트 제공.

가장 뼈아픈 지점은 영화의 감정적 중심을 잡아야 할 채선화(신세경 분) 캐릭터의 연출 방식이다. 북한 식당 종업원이자 정보원인 그녀는 인신매매 조직에 감금되는 극한의 위기를 겪는다. 그런데 이상하다. 생사가 오가는 처참한 상황 속에서도 화면 속 신세경은 방금 숍에서 나온 듯 풀메이크업 상태로 빛나는 외모를 유지한다.

자연스럽게 '베를린'의 전지현(련정희 역)이 떠오른다. 당시 전지현은 화장기 없는 창백한 맨얼굴과 트렌치코트 하나로 망명객의 불안과 피로감을 온몸으로 뿜어내며 극의 몰입도를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반면 '휴민트'의 신세경은 남성 주인공들의 총격전을 정당화하기 위한 '아름다운 희생양'처럼 전시될 뿐이다. 특히 논란이 된 '유리관 감금 신'은 처절해야 할 첩보물을 한순간에 인위적인 화보 촬영장으로 만들어버린 최악의 패착이다.

사람을 통해 정보를 캐내는 첩보 활동을 뜻하는 제목 '휴민트'. 하지만 영화는 초반의 팽팽했던 정보전을 슬그머니 치워버리고, 중반 이후부터는 눈물 쏙 빼는 비극적 멜로로 급발진한다. 진짜 사람이 부대끼는 냄새가 나야 할 '휴민트'에 사람 냄새는 없고 액션 도파민만 남았다.

결국 '휴민트'는 류승완 감독에게도, 그리고 한국 영화 팬들에게도 13년 전 '베를린'이 얼마나 거대하고 완벽한 이정표였는지를 다시 한번 뼈저리게 일깨워준 작품이 되었다. 액션은 분명 박수받을 만하지만, 그 액션이 향하는 빈약한 이야기는 깊은 한숨을 남긴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차가운 총성이 울릴수록, 베를린 뒷골목의 서늘했던 공기가 사무치게 그리워진다.

사진=MHN DB, N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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