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가계부' 스틸 컷
'발레 교습소'(2004) '너는 내 운명'(2005) '오늘의 연애'(2015) '나의 특별한 형제'(2019) 등 영화의 촬영 감독 출신인 성승택 감독은 어느 날 이사 중에 어머니가 장롱 깊은 곳에 보관해 뒀던 수십권의 가계부를 발견한다. 시대마다 색깔도 디자인도 다른 가계부는 그날그날 썼던 돈의 기록이 빼곡히 적혀있고, 마지막 한 칸에는 그날 하루를 보낸 심정 한마디씩이 적혀 있다. 그리고 그렇게 어머니의 가계부를 읽다가 발견한 한 문장은 어머니의 가계부에 대한 영화를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됐다. '여자로 태어난 것이 한스럽고 괴롭구나.'
'어머니의 가계부'라고 제목이 붙여진 다큐멘터리 영화는 이혼한 아들과 한집에 살게 된 노부부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성승택 감독의 어머니 윤종생 여사는 오래된 물건을 버리려고 하는 아들에게 "나도 너무 늙으면 갖다 버리겠다"고 일침하고, 결국 쓰레기봉투에 투척 된 물건을 도로 가져와 넣는다. 그렇게 오랫동안 버리지 않고 꽁꽁 품고 살아온 많은 물건 중 하나가 1969년부터 2016년까지 써 온 가계부 더미다.
카메라 앞에 앉은 윤종생 여사가 들려주는 가계부 속 이야기는 흥미진진하다. 5.16 군사정변 당일, 총소리를 들으며 우래옥에서 이름도 몰랐던 음식인 '냉면'을 먹고 창경궁 나들이를 했던 기억, 얼굴 한 번 보지 않고 결혼식을 올리고 부부가 된 이야기, 시어머니가 좋아하는 재료라 5일에 한 번은 샀던 동태, 자녀들이 태어날 때의 기억, 서울대를 졸업한 남편이 연좌제에 걸려 20년간 취직을 하지 못한 탓에 설움을 겪었던 가난했던 시간.
'어머니의 가계부' 스틸 컷
절약과 검소라는 미덕을 강요하며 여성들에게 쓰기를 권장했던 가계부는 오랫동안 가정주부들의 살림 필수품처럼 여겨졌고 어머니 윤 여사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렇게 쓰기 시작한 가계부에는 냉전 상황 속 일본에 사는 친척의 북송으로 오랫동안 연좌제에 걸려 돈벌이가 어려웠던 아버지의 고뇌, 그리고 그런 아버지와 함께 가족을 부양하며 힘겨움과 외로움을 감내했던 20~30대 어머니의 삶이 기록돼 있다. 80년대~90년대 경제 성장이 이뤄지고 난 뒤에는 가족들이 쓰는 돈의 단위가 달라지고, 형편이 좋아진다. 다 같이 해외여행을 떠난 기록이 나오고, 가족의 아픈 손가락, 작은누나의 기록도 있다. 그 시절 살았던 집으로 여행을 간 어머니는 그때가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라고 회상한다.
'어머니의 가계부' 스틸 컷
성승택 감독은 "가계부는 가족을 안전하게 지키고 싶었던 한 주부의 마음이자, 한 여성의 노동과 책임이 누적된 생존의 기록이다, 그 기록을 통해 우리는 한 가족의 내밀한 역사를 넘어, 한국 사회가 지나온 시간의 결을 생활의 수준에서 마주하게 된다"고 기획 의도를 밝힌 바 있다. 감독의 말처럼 '어머니의 가계부'는 한 여성의 사소한 일상의 기록을 통해 그가 지나온 시대를 생생하게 체감할 수 있는 작품이다. 영화의 말미 "그래도 사는 게 재밌었다"며 잔잔하게 웃는 어머니의 미소는 그 시대를 살아온 이들뿐 아니라 그 시대를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도 슬그머니 위로의 온기를 전한다. 슬픔과 기쁨을 뚫고 살아남은 한 사람의 이야기는 어느 시대, 어느 세대에도 의미가 있다. 상영 시간 96분. 오는 28일 개봉.
eujenej@news1.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