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년 쌓인 가계부로 돌아본 어머니 넘어 여자의 삶 [시네마 프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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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1,

2026년 October 26일, PM 06:00

'어머니의 가계부' 스틸 컷
* 영화의 주요 내용을 포함한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발레 교습소'(2004) '너는 내 운명'(2005) '오늘의 연애'(2015) '나의 특별한 형제'(2019) 등 영화의 촬영 감독 출신인 성승택 감독은 어느 날 이사 중에 어머니가 장롱 깊은 곳에 보관해 뒀던 수십권의 가계부를 발견한다. 시대마다 색깔도 디자인도 다른 가계부는 그날그날 썼던 돈의 기록이 빼곡히 적혀있고, 마지막 한 칸에는 그날 하루를 보낸 심정 한마디씩이 적혀 있다. 그리고 그렇게 어머니의 가계부를 읽다가 발견한 한 문장은 어머니의 가계부에 대한 영화를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됐다. '여자로 태어난 것이 한스럽고 괴롭구나.'

'어머니의 가계부'라고 제목이 붙여진 다큐멘터리 영화는 이혼한 아들과 한집에 살게 된 노부부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성승택 감독의 어머니 윤종생 여사는 오래된 물건을 버리려고 하는 아들에게 "나도 너무 늙으면 갖다 버리겠다"고 일침하고, 결국 쓰레기봉투에 투척 된 물건을 도로 가져와 넣는다. 그렇게 오랫동안 버리지 않고 꽁꽁 품고 살아온 많은 물건 중 하나가 1969년부터 2016년까지 써 온 가계부 더미다.

카메라 앞에 앉은 윤종생 여사가 들려주는 가계부 속 이야기는 흥미진진하다. 5.16 군사정변 당일, 총소리를 들으며 우래옥에서 이름도 몰랐던 음식인 '냉면'을 먹고 창경궁 나들이를 했던 기억, 얼굴 한 번 보지 않고 결혼식을 올리고 부부가 된 이야기, 시어머니가 좋아하는 재료라 5일에 한 번은 샀던 동태, 자녀들이 태어날 때의 기억, 서울대를 졸업한 남편이 연좌제에 걸려 20년간 취직을 하지 못한 탓에 설움을 겪었던 가난했던 시간.

'어머니의 가계부' 스틸 컷

감독은 그날그날 썼던 돈을 십 원짜리 한 장, 일 원짜리 한 장 빼먹지 않고 모조리 기억해 기록했던 어머니의 총명함에 감탄하며, 어머니이자 한 여성의 삶을 격동의 근현대사 위에 얹어 본다.

절약과 검소라는 미덕을 강요하며 여성들에게 쓰기를 권장했던 가계부는 오랫동안 가정주부들의 살림 필수품처럼 여겨졌고 어머니 윤 여사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렇게 쓰기 시작한 가계부에는 냉전 상황 속 일본에 사는 친척의 북송으로 오랫동안 연좌제에 걸려 돈벌이가 어려웠던 아버지의 고뇌, 그리고 그런 아버지와 함께 가족을 부양하며 힘겨움과 외로움을 감내했던 20~30대 어머니의 삶이 기록돼 있다. 80년대~90년대 경제 성장이 이뤄지고 난 뒤에는 가족들이 쓰는 돈의 단위가 달라지고, 형편이 좋아진다. 다 같이 해외여행을 떠난 기록이 나오고, 가족의 아픈 손가락, 작은누나의 기록도 있다. 그 시절 살았던 집으로 여행을 간 어머니는 그때가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라고 회상한다.
'어머니의 가계부' 스틸 컷

영화는 가계부의 기록과 어머니, 아버지의 인터뷰, 아들과 부모님이 과거의 기억을 따라 떠난 여행 등으로 구성돼 있다. 크게는 느슨한 연대기적 전개를 택했지만, 자세히 들어가 보면 시간의 나열보다는 현재의 사건과 과거의 사건을 연결해 묘한 여운과 의미를 만들어내는 데 천착한 연출 방식을 확인할 수 있다. 편집의 묘미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성승택 감독은 "가계부는 가족을 안전하게 지키고 싶었던 한 주부의 마음이자, 한 여성의 노동과 책임이 누적된 생존의 기록이다, 그 기록을 통해 우리는 한 가족의 내밀한 역사를 넘어, 한국 사회가 지나온 시간의 결을 생활의 수준에서 마주하게 된다"고 기획 의도를 밝힌 바 있다. 감독의 말처럼 '어머니의 가계부'는 한 여성의 사소한 일상의 기록을 통해 그가 지나온 시대를 생생하게 체감할 수 있는 작품이다. 영화의 말미 "그래도 사는 게 재밌었다"며 잔잔하게 웃는 어머니의 미소는 그 시대를 살아온 이들뿐 아니라 그 시대를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도 슬그머니 위로의 온기를 전한다. 슬픔과 기쁨을 뚫고 살아남은 한 사람의 이야기는 어느 시대, 어느 세대에도 의미가 있다. 상영 시간 96분. 오는 28일 개봉.

eujenej@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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