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가계부' 성승택 감독이 26일 서울 종로구 뉴스1 사옥에서 열린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26.10.26 © 뉴스1 권현진 기자
'어머니의 가계부' 성승택 감독이 26일 서울 종로구 뉴스1 사옥에서 열린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26.10.26 © 뉴스1 권현진 기자
"'어머니에게도 여자로서의 삶이 있었구나…' 처음으로 생각했어요. 위대하진 않아도 어머니의 삶에도 분명한 가치가 있다는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죠. 그게 출발이었습니다."
28일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어머니의 가계부'는 윤종생 여사의 얼핏 퉁명스럽고 투박한 사투리가 주는 웃음으로 문을 연다. 오랜 시간 써온 낡은 물건들을 버리려는 아들을 향해 "나도 너무 늙으면 갖다 버리겠다"며 역정을 내고, "이런 걸 다 어떻게 기억하느냐"는 아들에게 "나도 머리 좋았다"고 젊을 적 이야기를 하는 나이 든 어머니의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익숙하고 정겹다.
"아들들은 어머니가 미인이었는지, 여자인지, 그런 사실들에는 관심이 없죠.(웃음) 우연히 전주로 이사하면서 (어머니의) 장롱을 열었는데 47년간 써 온 가계부가 나왔어요. 이런 상황에서 누구나 가장 먼저 찾아보는 건 자신이 태어난 날일 거예요. 70년대 가계부를 펼쳐 보니 제가 태어났을 때 고기와 미역을 사고 천 기저귀를 산 기록이 있었어요. 또 제 이름을 짓는 데 얼마를 썼는지, 아버지가 누구를 만나 술을 마셨는지까지 있었죠. 그러다 제가 아파서 밤새워 고생했다는 기록 아래 '여자로 태어나서 한스럽다'는 취지의 글이 있었어요. 그게 너무 충격이었어요."
그렇게 모아 본 어머니의 가계부는 1969년부터 2016년까지 모두 47권이었다. 무려 47년간 한 해도, 한 달도, 하루도 빠지지 않고 기록을 이어왔다. '어머니의 가계부'는 어머니가 가계부에 적은 47년간의 기록을 따라간다. 가계부의 기록과 어머니 윤종생 여사를 비롯한 아버지와 가족들의 인터뷰, 아들과 부모님이 과거의 기억을 따라 떠난 여행 등을 통해 어머니의 일생을 돌아보는 한편, 이를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에 겹쳐두고 재해석해 보며 격동의 시대를 살아간 한 여성으로서의 어머니를 조명한다.
'어머니의 가계부' 성승택 감독이 26일 서울 종로구 뉴스1 사옥에서 열린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26.10.26 © 뉴스1 권현진 기자
"제가 기억하는 어머니는 늘 강하고 부지런하고 누구에게도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는 분이었거든요. 집안에 사건 사고가 잦았지만, 한 번도 거기에 눌린 모습을 보이지 않았어요. 그런데 가계부에는 아버지와 떨어져 지내며 느낀 외로움, 돌아가신 외할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가난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어요. '어머니에게도 여자로서의 삶이 있었구나' 하고 처음 생각하게 됐죠."
제작 기간은 2022년부터 2026년까지 4년이다. 2024년에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돼 관객들에게 선보였지만, 이후에도 편집을 여러 번 더했다. 그 사이 어머니는 노환으로 인해 기억이 조금씩 흐려지고 있었다. 부모님과 함께 과거로 여행을 떠난 막내아들은 그동안 몰랐거나 어렴풋이 알았던 가족의 이야기를 많이 알게 됐다. 5.16 군사정변 당일, 총소리를 들으며 우래옥에서 이름도 몰랐던 음식인 '냉면'을 먹고 창경궁 나들이를 했던 철부지 신혼부부였던 부모님의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 서울대를 졸업한 아버지가 연좌제에 걸려 20년간 취직을 하지 못해 겪었던 어머니의 설움, 가족의 아픈 손가락인 작은 누나의 병치레 당시에 느꼈던 어머니의 애달픔은 당시의 어머니 나이가 된 지금 더 이해하게 되는 감정이었다.
'어머니의 가계부' 스틸 컷
"무언가 마음속에서 풀리는 느낌이 있었어요. 아버지가 연좌제 때문에 오랫동안 취업하지 못했던 이야기처럼 가족이 쉽게 꺼내지 못했던 사연도 말할 수 있었죠. 영화를 만들면서 가족의 상처가 조금씩 치유되는 것 같았어요. 글쓰기나 미술, 음악을 포함한 예술에는 그런 치유의 기능이 있다고 생각해요. 자기 안의 불안을 표현하고 정리하면서 천천히 가라앉히는 것이 아닐까 싶어요."
'어머니의 가계부'는 2024년 열린 제29회 부산 국제영화제 와이드 앵글 섹션 초청작이다. 성 감독은 영화제 상영에 어머니를 초대했고, 이는 2년이 지난 지금도 어머니가 기억하는 추억이 됐다.
"이제 인생에서 어머니와 함께할 날이 많지 않다는 생각을 해요. 이 다큐멘터리를 만들면서 부모님과 이렇게 많은 대화를 해본 적이 있었나 싶었어요. 지난 5년이 저에게는 행복한 시간이었어요. 보통 아들들은 부모님과 깊은 대화를 잘 하지 않거든요. 맛있는 것 사드리고 커피 한 잔 마시고 헤어지는 것이 효도의 끝인 경우도 있죠. 그런데 촬영하려면 어머니의 말을 끌어내야 하니 대화를 하게 돼요. 함께 여기저기 가보고 절에도 가봤어요. 같은 이야기를 수백 번 다시 듣는 어려움도 있었지만, 그 시간 자체가 좋았던 것 같아요."
성승택 감독은 상업 영화 촬영 감독 출신이다. 2000년대 초반부터 상업 영화의 촬영부 및 조명부로 영화계에 입성해 영화 '발레교습소'(2004)로 데뷔, '너는 내 운명'(2005) '오늘의 연애'(2015) '나의 특별한 형제'(2019) '싱글 인 서울'(2023) 등의 촬영 감독으로 약 20년 넘게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그런 그는 10년 전쯤 우연히 발견한 집 옆의 정신장애인 사회복지 시설을 위해 홍보 영상을 찍어주려다 다큐멘터리 '옆집'(2016)을 찍게 됐고, 프로필에 '다큐멘터리 감독'이라는 직업 한 줄을 더하게 됐다. '어머니의 가계부'는 그런 그가 선보이는 세 번째 다큐멘터리 영화다.
'어머니 가계부' 포스터
"촬영 감독 출신이라 장점이 있을 것 같지만 오히려 자기 장점 때문에 망할 수도 있어요. 촬영감독으로서 이미지와 컷의 리듬, 편집은 알지만, 다큐멘터리의 본질은 이야기와 서사에요. 이미지와 이야기는 비슷해 보여도 달라요. 텍스트는 이미지와 달라 갑자기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면 흐름이 깨지죠. 그래서 촬영 기술을 과시하기보다 이야기를 잘 만들고 인물에게 집중하려고 했어요. 새로운 일을 배우려면 자기 것을 내려놓고 원점에서 시작해야 하죠."
현재 성 감독은 차기작 2편의 기획 및 제작을 진행 중이며, 전주대학교 영화방송학과의 조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기도 하다. 벌써 3편의 다큐멘터리를 만든 감독으로서 한국 다큐멘터리 영화의 발전을 위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다.
"한국에는 세계적으로 인정 받는 다큐멘터리 감독이 많지만, 작업의 지속 가능성이 작아요. 그 점이 아주 아쉬워요. 한 작품당 10만명이 보는 시장이 형성되면 감독들이 다음 작품을 이어갈 수 있어요. 우리나라는 이미 국가 차원의 다큐멘터리 지원이 많지만, 작품을 만든 뒤 유통하고 수익을 회수할 구조가 부족합니다. 제작을 지원하는 데서 더 나아가 관객들과 만날 수 있도록 돕는다면 K팝이나 K푸드처럼 해외로 뻗어나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관심이 필요합니다."
eujenej@news1.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