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바람이 길 열고…물 품은 풍경 속으로

생활/문화

이데일리,

2025년 4월 25일, 오전 11:03

강원도 춘천 의암호 ‘킹카누’. 사단법인 물길로가 운영하는 킹카누는 단순한 레저가 아니라 ‘같은 배에 탔다’는 상징을 실천하는 감동의 여정이다.(사진=사단법인 물길로)
[춘천(강원)=이데일리 강경록 여행전문기자] 춘천의 봄은 조용하다. 꽃은 수선을 떨지 않고 피어나고, 물은 아무 말 없이 흘러간다. 그 조용함은 비워진 공간이 아니라 차오른 감각이다. 도시의 속도와 불빛에 길 들여진 감각들이 비로소 자신을 되찾는 곳. 춘천은 그렇게 봄을 품는다. 그 조용한 초대에 응답한 사람들. 이 여행은 그들과 나란히 걷는 길이자, 같은 배를 타는 여정이었다. 장애가 있든 없든, 나이가 많든 적든, 누구도 뒤처지지 않고 모두가 함께할 수 있는 ‘베리어프리’(Barrier-Free) 춘천. 그 길 위에서 ‘같이’의 의미를 되새긴다.

강원도 춘천 의암호 ‘킹카누’. 사단법인 물길로가 운영하는 킹카누는 단순한 레저가 아니라 ‘같은 배에 탔다’는 상징을 실천하는 감동의 여정이다.(사진=사단법인 물길로)
◇물 위에서 만난 연대 ‘의암호 킹카누’

의암호는 고요하다. 바람은 수면을 스치듯 지나고, 물결은 소리 없이 말을 건넨다. 전동휠체어를 타고 천천히 경사로를 따라 내려갔다. 킹카누 나루터. 실내 대기실과 안전펜스, 장애인 전용 화장실이 준비돼 있었다. 매끄럽게 연결된 선착장은 무심한 듯 보이지만 치열한 배려의 흔적이 곳곳에 숨어 있었다.

킹카누는 국내 유일의 12인승 캐나디언 스타일 대형 카누. 전기 프로펠러로 움직이며 노를 젓지 않아도 수면을 유영한다. 여럿이 킹카누에 몸을 실었다. 물 위의 움직임은 조용하지만 깊다. 묘사해설사 ‘킹스맨’이 조용히 속삭인다. “지금은 갈대밭 옆입니다. 바람 소리를 들어보세요.”

눈을 감았지만 풍경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 또렷해진다. 청각, 촉각, 기온, 바람의 방향. 감각은 되살아나고, 경계는 사라진다. 킹카누에서는 장애와 비장애가 의미를 잃는다. 사단법인 물길로의 박보영 상임이사는 말한다. “시각장애인분들이 ‘풍광이 아름답다’고 하실 때,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다는 걸 배웠습니다. 감각이 다르다고 감동이 다르지는 않거든요.”

킹카누는 가족, 청소년, 외국인 단체 등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킹카누 원정대, 카누 레이스, 패들 보드 아카데미까지. 단순한 체험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 다리를 놓는 활동들이다. 박 이사는 덧붙인다. “우리는 장애인을 위한 특별한 공간을 만든 게 아닙니다. 모두를 위한 공간을 만들고 싶었어요. 그 시작이 바로 ‘같이 탈 수 있는 배’였습니다”

누구나 떠날 자유, 모두가 누릴 자유. 의암호 물길 위에서 그 약속은 실현되고 있다.

강촌레일바이크(사진=강촌레일바이크)
◇철로 위의 동행 ‘강촌 레일바이크’

북한강을 따라 이어진 오래된 철길. 그 위를 달리는 김유정 레일바이크는 이제 단순한 레저가 아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페달을 밟으며 같은 풍경을 바라보는 동행의 철로가 되었다.

휠체어석이 있는 레일바이크는 앞좌석을 걷어낸 공간에 턴테이블을 설치해 휠체어를 그대로 실을 수 있다. 탑승장은 경사로로 연결돼 있다. 휠체어 리프트와 무장애 보행로, 음성안내 시스템이 조화를 이룬다. 이 세심한 구성은 지난해 열린 관광지로 지정되며 완성됐다.

페달을 밟자 철길 위로 봄꽃이 흐른다. 속도는 느리지만, 그 느림이 주는 감각은 놀랍도록 선명하다. 바람, 소리, 진동, 햇살의 결까지 몸이 기억한다. “서로 다른 속도로 같은 풍경을 공유하는 것. 그것이 함께하는 여행의 본질 아닐까요?” 강촌 레일바이크 이진호 팀장의 대답이다.

김유정 레일바이크에는 휠체어를 타고 승강장으로 내려갈 수 있도록 휠체어 전용 엘리베이터를 설치했다.
이곳은 철로 위의 평등한 여정이 실현되는 곳이다. 철길은 누구에게도 차별 없이 열린 풍경이 되고, 여정 자체가 목적이 되는 시간 속으로 여행자를 초대한다.

레일바이크에서 내려 낭만 열차로 갈아타는 여정 또한 무장애로 이어진다. 휠체어 리프트가 탑재된 이 열차는 탑승 전 안내 방송, 시각장애인을 위한 음성 유도 장치, 이동 보조 블록 등으로 배려를 더했다. 단지 이동의 편리함을 넘어 여행자들이 감정의 불편 없이 이 풍경에 몰입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이 팀장은 덧붙였다. “편의시설보다 더 중요한 건 감정입니다. 휠체어를 탄 여행자든, 유모차를 끄는 보호자든, 이 길 위에서 ‘같은 감정’을 느낄 수 있어야 진짜 여행이죠.”

애니메이션 박물관 외부 모습(사진=애니메이션 박물관)
◇감각의 전시장 ‘애니메이션박물관 & 토이로봇관’

춘천 애니메이션박물관과 토이로봇관은 상상의 문을 여는 두 개의 열쇠다. 눈으로 보는 전시를 넘어 감각으로 만지고 경험하는 체험의 장으로 변모하고 있다.

2024년 열린관광지로 지정된 이곳은 장애인의 접근성과 체험권을 확대하기 위해 대대적인 개선 작업을 거쳤다. 주차장에서부터 매표소, 건물 입구, 전시장 내부에 이르기까지 모든 동선은 무장애 보행로로 정비했다. 점자 겸용 종합 안내판과 촉지형 유도 시스템, 휠체어 접근이 가능한 전시대와 체험 부스는 감각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공간 구성의 결과다.

내부에는 음성안내기와 교감형 로봇, 점자 표기와 촉각 지도, 낮은 키오스크까지 배치했다. 특히 어린이와 지체장애인을 위한 전시 콘텐츠는 높낮이를 조절하거나 직접 조작할 수 있게 설계해 누구나 주체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

토이로봇관(사진=토이로봇관)
박물관 관계자 목대균 대리는 말한다. “관람이란 단순히 보는 것을 넘어 느끼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박물관이 누구에게나 열린 상상의 놀이터가 되길 바랍니다.”

전시는 단지 감상을 넘어 관람자와의 교감을 지향한다. 요청 시 배치되는 전문 해설사와 음성안내기는 시각·청각 장애인을 위한 맞춤형 서비스로 자리 잡고 있다. 앞으로는 자막과 수어 영상 콘텐츠도 순차적으로 확대될 예정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공간이 ‘장애인을 위한’ 박물관이 아니라 ‘모두가 누릴 수 있는’ 공간이라는 점이다. 예술과 기술, 상상과 현실이 만나 모두에게 열리는 문을 만들어가고 있다.

◇높이마저 평등한 ‘스카이워크와 삼악산 케이블카’

춘천 소양강 위를 걷는 투명한 길. 스카이워크는 설렘과 두려움이 교차하는 공간이다. 중요한 건 이곳까지 누구나 도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지하보도를 지나 경사로를 따라 이어지는 접근 동선은 유모차도 휠체어도 막지 않는다. 유리 바닥 위 풍경은 아름답지만 그보다 더 값진 건 ‘같이’ 그 위에 올라설 수 있다는 사실이다.

삼악산 케이블카는 춘천의 베리어 프리 철학을 가장 정교하게 담고 있다. 전용 슬로프, 음성 안내, 명확한 표지판, 휠체어 전용 탑승 매뉴얼까지. 하늘로 향하는 이 길엔 단 한 사람도 배제되지 않는다.

하늘 위에서 춘천은 다르게 보인다. 강과 산, 도시와 사람. 함께 본다는 것, 그것은 풍경을 넘어선 연대다. 그 안엔 수많은 손길이 깃들어 있다. 턱을 없애고 안내를 더하고 속도를 맞추는 조용한 혁명이다. 춘천은 이제 풍경을 ‘보여주는 도시’가 아닌 그 풍경 속으로 ‘초대하는 도시’로 바뀌고 있다.

문지영 한국관광공사 열린관광파트장은 “모두를 위한 여행을 지향하는 열린관광지 조성이 지속 확대되어 전국의 더 많은 관광지가 열린관광지가 될 수 있도록 따뜻한 관심과 응원을 부탁드린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