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중절 갈망하는 장애 여성 '샤카', 우리와 다를까요?

생활/문화

이데일리,

2025년 6월 02일, 오전 05:35

[이데일리 장병호 기자] “내 휘어진 몸속에서 태아는 제대로 크지도 못할 텐데. 출산도 견뎌내지 못할 것이다. 물론 육아도 어렵다. 하지만 아마도 임신과 중절까지라면 보통 사람처럼 가능할 것이다. 생식기능에는 문제가 없으니까. 평범한 여자 사람처럼 아이를 임신하고 중절해 보는 게 나의 꿈입니다.” (소설 ‘헌치백’ 중)


국립극장 연극 ‘헌치백’ 신유청 연출. (사진=국립극장)
장애인 작가 최초로 일본의 권위 있는 문학상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한 이치카와 사오의 소설 ‘헌치백’이 연극으로 초연 무대에 오른다. 자막과 해설을 제공하는 무장애 공연 ‘헌치백’으로 오는 12일부터 15일까지 서울 중구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선보인다.

연극 ‘그을린 사랑’, ‘와이프’, ‘엔젤스 인 아메리카’ 등으로 백상예술대상, 동아연극상 등을 수상한 연출가 신유청(44)이 첫 무장애 공연 연출에 도전한다. 최근 국립극장에서 만난 신 연출은 “그동안 작품을 하면서 갖게 된 상투적인 작업 스타일을 깰 수 있는 원동력이 될 것이라는 기대로 무장애 공연에 도전하게 됐다”고 밝혔다.

‘헌치백’은 희귀 근육질환인 ‘선천성 근세관성 근병증’이라는 중증 장애를 지닌 작가 이치카와 사오의 자전적 소설이다. 스스로 ‘꼽추 괴물’이라 부르는 중증 척추 장애인 ‘샤카’가 남성 간병인에게 임신과 중절을 도와주는 대가로 1억엔을 제시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장애인도 우리와 똑같은 욕망과 욕구를 지닌 인간임을 돌아보게 한다.

국립극장 연극 ‘헌치백’ 연습 장면. (사진=국립극장)
신 연출이 ‘헌치백’에 매료된 점도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깨는 파격적인 설정과 구성이었다. 신 연출은 “‘헌치백’을 처음 읽었을 때 내가 가진 인식의 틀이 깨지는 것 같았다”며 “무장애 공연은 기존 공연과는 달라야 했고, 그런 점에서 ‘헌치백’이 딱이었다”고 설명했다.


주인공 샤카는 2명의 배우가 동시에 연기한다. 신 연출과 ‘와이프’, ‘그을린 사랑’ 등을 같이 작업한 배우 황은후, 그리고 저신장 장애 배우 차윤슬이 샤카 역에 캐스팅됐다. 다른 출연자인 원훈, 김별, 우범진 등은 정해진 배역 외에 다양한 인물들을 연기한다. 주인공 샤카에 대해 관객이 다양한 시선으로 바라보도록 한 설정이다.

신 연출은 “샤카는 타자와 ‘마찰’이 없는 상태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쓰면서 ‘마찰’을 그리워하는 인물”이라고 소개했다. 이어 “우리 주변의 다른 사람이 우리의 존재를 비춰주는 ‘거울’이라면 샤카는 그런 ‘거울’이 없다”며 “연극에선 샤카를 비춰줄 존재가 필요하겠다 싶어서 배우들에게 특정한 배역을 부여하지 않았다”고 연출 의도를 설명했다.

국립극장 연극 ‘헌치백’ 콘셉트 이미지. (사진=국립극장)
연극은 소설의 문장을 대사로 변형하지 않고 서술형 문장을 그대로 무대 위에 옮긴다. 장애인의 내밀한 욕망과 사회적 차별의 현실을 그린 원작을 최대한 훼손하지 않기 위해서다. 신 연출은 “원작을 일반적인 희곡으로 각색하면 주인공 샤카의 단면만을 보여줄 것 같았다”며 “소설을 단순히 무대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소설을 읽고 난 뒤 갖게 될 여러 가지 해석을 무대에서 시각적, 청각적으로 표현하는 것에 집중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샤카가 ‘임신’과 ‘중절’을 꿈꾸는 이유가 있다. 장애인에게도 욕망이 존재한다는 것, 이를 통해 장애·비장애의 경계 없이 똑같은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다는 걸 보여주기 위함이다. 신 연출은 ‘헌치백’이 장애인도 우리와 다를 것이 없다는 것, 더 나아가 인간의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는 연극이 되길 바란다. 신 연출은 “관객이 ‘헌치백’을 통해 우리는 왜 존재하는 것이고 서로 다른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각자만의 답을 찾아가면 좋겠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