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년 6월 5일 목요일, 롯데콘서트홀. 한여름을 앞둔 초저녁에 객석은 빈 자리를 찾기 어려웠다. 지난 5월, 이탈리아 밀라노 라 스칼라 오페라 극장의 음악감독으로 선임된 정명훈 감독이 KBS교향악단 제815회 정기연주회를 지휘했다.
프로그램은 브람스 교향곡 3번과 4번. 상임 음악감독 부재 속에서도 오케스트라의 ‘사운드 구심점’을 어떻게 복원할 수 있는지 몸소 증명한 무대였다.
브람스 교향곡 3번은 약 35분 남짓한 소규모 구조 속에 압축된 서정과 긴장감을 담아낸 작품이다. 이날 정명훈은 1악장의 알레그로 콘 브리오를 정제된 호흡으로 밀도 있게 설계했고, 잔향이 짧은 롯데콘서트홀 특성을 감안해 중음역의 윤곽을 더욱 또렷이 부각했다.
결과적으로 가을빛 낙엽을 밟는 듯한 온기가 흐르면서도 음 하나하나가 과잉 표현 없이 제 자리를 지켰다. 2·3악장에서 관객은 짙지만 번다하지 않은 관현악의 결을 따라 숨을 고를 수 있었고, 4악장에서는 클라이맥스 직전까지 ‘바짝 잡아당기는’ 특유의 템포 컨트롤이 극적인 완급을 살렸다.

이어진 교향곡 4번은 숙성된 와인을 천천히 따듯 낮은 울림으로 시작됐다. 정명훈은 1악장을 오래 고민한 듯, 각 악기군의 대화 구조를 넉넉한 제스처로 “지켜보며” 이끌었고, 파사칼리아 형식의 4악장에서는 심벌즈와 팀파니를 필요 이상 확장하지 않는 대신 중·저음 현을 단단히 묶어 비극적 서사를 완성했다.
3분 가까이 이어진 커튼콜 동안 관객은 함성과 기립 박수로 화답했고, 지휘자는 악보를 접은 채 오케스트라를 무대 앞에 세워 과분하지 않은 찬사를 오롯이 나누었다.
최근 몇 해를 돌아보면 정명훈은 객원 지휘자 가운데 KBS교향악단의 바통을 가장 자주 잡아 왔다. 2024년 3월 베르디 ‘레퀴엠’(Choral Ⅰ)과 7월 로시니 ‘스타바트 마테르’(Choral Ⅱ)를 지휘하며 종교음악 레퍼토리를 오케스트라 정규 시즌에 안착시키는 실험을 시도했고, 2023년 9월에는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브루크너 교향곡 7번으로 대편성 레퍼토리의 중량감을 증명했다.
팬데믹 직후이던 2020년 12월 24일 특별연주회에서 베토벤 ‘전원’을 편안한 호흡으로 풀어낸 장면 역시, 아직도 많은 서울 음악애호가들에게 ‘마에스트로의 귀환’으로 기억된다.
정명훈의 지휘는 KBS교향악단에 세 가지 유산을 남긴다. 첫째, 선 굵은 해석과 세밀한 음형 정돈 사이의 균형 감각. 둘째, 레퍼토리 확장과 프로그램 기획에 대한 확신. 셋째, 객원 체제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사운드 정체성이다.
그러나 바로 그 유산이 “상임지휘자 공백”이라는 현실을 더 또렷이 드러내기도 한다. 지난해 814회 정기연주회에 이어 이번 815회 연주회에서도 관객과 평단 모두 ‘사운드 구심점’의 시급함을 다시 환기받았다. 정명훈 효과가 매번 객석을 가득 채우는 이유는 단지 네임 밸류만이 아니다. 지휘자가 악단 앞에서 품은 일관된 미학이 청중에게 곧바로 체감되기 때문이다.

공연을 마치고 나오며 몇몇 관객이 “정명훈이 상임이면 좋을 텐데”라고 읊조린다. 그러나 음악계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오히려 이번 무대가 던진 메시지는, 정명훈이라는 존재를 계기로 KBS교향악단이 하루빨리 장기적 예술 비전을 공유할 ‘음악감독 체제’를 구축해야 한다는 당위일 것이다.
오늘밤 브람스의 농밀한 음향이 오래도록 잔상으로 남는 이유 역시, 그 당위를 귀에 새겨 넣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글: 음악칼럼니스트 여홍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