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사세보항에 정박해 있는 코스타세레나호 (사진=이민하 기자)

크루즈 갑판 위 트랙에서 달리기를 하고 있는 승객 (사진=이민하 기자)
지난달 26일 새벽. 태평양 한가운데를 항해 중인 ‘코스타 세레나’호. 총길이 290m, 건물 15층 규모의 해상 도시 위에서 하루는 평소와 다르게 흘렀다. 승객 2608명, 승무원 1000여 명이 탑승해 각자의 일상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갑판 위 조깅 트랙에는 새벽부터 사람들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누군가는 땀이 맺힌 이마를 닦았고, 누군가는 파도 너머로 시선을 고정한 채 달렸다. 새벽 햇살이 물드는 갑판 위에서 하루는 조용히 그러나 단단하게 시작됐다. 정년퇴직 후 크루즈를 선택한 김승철 씨(61)는 “땅에서는 이렇게 오래 달릴 일이 없었죠. 여기선 달리고 싶은 마음이 생겨요”라고 했다.

솔레 중앙 수영장 마당에서 라인 댄스를 추고 있는 승객들 (사진=이민하 기자)
크루즈 안에서는 하루 평균 60개 이상의 프로그램이 열린다. 운동 수업만 해도 13개. 요가, 배구, 농구, 라틴댄스까지 다양한 활동이 준비돼 있다. 대부분 초보자도 쉽게 참여할 수 있도록 구성됐다. 김신자 씨(62)는 “아침엔 헬스, 점심엔 수영, 오후엔 춤까지 추다 보면 하루가 순식간”이라고 했다. 의외로 일정이 빽빽하다는 말도 자주 들린다.
다양한 강의와 체험도 마련돼 있다. 쿠킹 클래스, 명상 워크숍, 빙고게임 등은 연령대에 맞는 선택지를 제공한다. 도서관, 키즈 클럽, 무비타임 등 정적인 콘텐츠도 충분하다.

대극장에서 진행된 조광조 서커스 공연(사진=이민하 기자)
해가 지면 선내는 또 다른 공간이 된다. 대극장에서 펼쳐지는 공연이 크루즈의 밤을 밝히면서다. 한국 트로트 가수의 무대에 박수가 터지고, 중년 관객의 어깨는 자연스레 리듬을 탔다. “이탈리아 크루즈에서 한국 가수를 볼 줄은 몰랐다”는 승객의 한마디에 놀라움이 묻어났다.
무대는 매일 밤마다 달라진다. 뮤지컬, 마술쇼, 클래식 콘서트, 노래 대회까지. 공연은 전 연령을 아우르고, 일부는 한국어 통역도 제공된다. 좌석은 자율 배석제로 운영돼 선착순 입장이며, 일부 인기 공연은 입장 30분 전부터 줄이 생긴다.

크루즈에서 댄스 파티를 즐기고 있는 승객들 (사진=이민하 기자)
흥을 돋우는 건 관객만이 아니다. 선내 바의 외국인 바텐더는 “한국 승객은 새벽까지도 열정이 식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랜드홀 안에는 이른 새벽까지 춤을 추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밤이 깊을수록 리듬은 더 커졌다

일본 사세보의 도자기 마을(사진=이민하 기자)
크루즈가 정박하면 도시가 열린다. 대만 타이베이의 고궁 박물관과 시먼딩, 일본 사세보의 도자기 마을과 아와시마 신사, 쇼핑거리까지 여정은 짧지만 인상은 깊었다. 작은 도자기 상점에서 찻잔을 고르던 이임여 씨(70)는 “아이 낳느라 고생한 며느리에게 주고 싶어 하나 고르고 있다”고 말했다.
기항지 일정은 평균 5~7시간 남짓. 도시의 핵심을 짧고 굵게 경험하는 방식이다. 이동은 크루즈 전용 셔틀버스나 전세버스를 통해 이뤄진다. 날씨, 항만 사정에 따라 시간이 조정되기도 한다. 여행자 중 일부는 기항지 관광보다는 배로 돌아와 휴식을 선택하기도 했다.
이번 크루즈 승객 다수는 50~70대였다. 예전과 달리 조용히 쉬기보다는 몸을 움직이고 체험하는 흐름이 강했다. “집에서는 운동할 생각도 안 했는데 여기선 자꾸 몸이 움직인다”는 윤정자 씨(57)의 말처럼, 크루즈 안에서는 자연스럽게 에너지가 솟는다.
부산으로 향하던 마지막 밤. 곳곳에 소규모 모임이 생겼다. 낯설었던 이들은 연락처를 주고받고,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나눴다. 짧은 여정이었지만 누군가에겐 오랜만의 쉼이었고, 또 다른 누군가에겐 여행의 본질을 다시 떠올리는 계기였다.
크루즈는 느린 흐름 안에서 사람들을 다시 이어준다. 서두르지 않아도 되고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된다. 스스로 선택하고, 그 안에서 의미를 찾으면 되는 여행. 해가 수평선 너머로 지는 순간. 누군가 작게 말했다.
“여행의 또 다른 재미를 알아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