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라는 비극적 희극...안톤 체홉 '체호프 희곡선' (오늘의 책)

생활/문화

MHN스포츠,

2025년 7월 17일, 오전 06:00

(MHN 이나영 인턴기자) 오래도록 주목 받는 고전으로 안톤 체호프의 희곡 선집 '체호프 희곡선'을 소개한다.

러시아의 극작가이자 소설가, 의사였던 안톤 체호프는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와 레프 톨스토이 등 러시아 사실주의 문학이 만개하고 저물어가던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활동하며 그 황금기의 마지막을 장식한 '황혼의 작가'로 불리운다.

사실주의, 심리주의 등이 체호프의 희곡을 수식하기 위해 동원되고는 하지만 19세기 체호프의 희곡은 어떤 사조에도 간단히 속하지 않는 고유한 조류가 되어 모스크바 예술 극장을 점령했다. 극적인 사건이 부재하고 다양한 군상의 인물들이 집단적 독백을 형성한다는 특징이 주로 거론된다.

'체호프 희곡선'에는 그의 4대 장막으로 손꼽히는 '갈매기', '바냐 아저씨', '세 자매', '벚꽃 동산'이 수록되었다. 체홉의 극은 서울대 권장도서 100선과 미국대학위원회 SAT 추천 도서에 선정되기도 한 불멸의 고전.

■체호프 희곡선|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박현섭 옮김|을유문화사

체홉을 극작가로 조명시킨 희곡 '갈매기'에서 언제나 검은 옷을 입고 다니는 인물 마샤는 말한다. ▶"이건 제 삶에 대한 상복이에요. 전 불행하거든요."

다인원이 등장하는 체홉의 극에는 인물들이 떠드는 무수한 말의 다발들이 있지만 그 문장들이 발화자가 아닌 타인-청자에게 전심으로 닿기란 요원해보인다. 가볍게 던지는 말들과 가볍게 흘리는 말들. 그들은 함께 있지만 서로가 불가해하고 관계와 소통은 어긋나며 삶은 기본적으로 정처 없고 속절 없다. 극적인 사건이 부재하며 사건화될 만한 전모는 무대 밖으로 과감히 생략되어 있다. 말을 통해 누군가는 권총 자살을 했고(갈매기) 영지는 팔리고 있다는 것(벚꽃동산)이 은연중에 전달될 뿐이다.

인물들이 일상적인 말을 두르고 에울러 천착하는 질문은 이런 것에 가까운 듯하다. '도대체 삶이 왜 이러지? 인생 참 내 맘대로 안 되네? 이게 아닌데?'

인물들을 회한에 잠기게 하고 무상하게 하는 요인은 사건이라기보다는 일상, 그저 삶 자체일 뿐이다. '바냐 아저씨'에서 엘레나는 말한다. ▶"악인이나 화재 때문에 세상이 망하는 게 아니라, 증오, 적대감 같은 하찮은 일 때문에 세상이 망한다." 바냐는 말한다. ▶“우리가 왜 사는지, 왜 고통을 받는지 … 알 수만 있다면, 그걸 알 수만 있다면!” '벚꽃동산'에서 텅 빈 저택에 홀로 남은 집사 피르스는 중얼거린다. ▶“인생이 흘러가 버렸어, 산 것 같지도 않은데…. (눕는다) 눕자…. 이젠 기운도 없고, 남은 게 아무것도 없어, 아무것도…. 에이, 이놈아…등신아!”

생전에 의사로 일하기도 했던 체호프는 이입하거나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멀리서 진단하는 시선'을 극에서도 적용한 듯하다. 한탄을 일삼는 다양한 인간 군상들은 일정한 거리를 둔 채로 지구를 점령한 인간이라는 종을 내려다보듯 조망된다. ▶“거위들도 요란스럽게 꽥꽥거리다가도 곧 조용해지곤 하죠…” 인물들이 임하고 있는 생활이 때때로 우스꽝스러우며 체호프가 자신의 극을 '희극'이라고 표명한 이유도 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적이라는 속성을 가진 탓일 것.

그 부조리한 삶에 놓여서 어떤 인물은 자살을 택하고 어떤 인물은 화해하지 못한 채로도 생을 유지한다. 저마다 다른 답을 가져갈 수 있겠지만 억척스레 생에 붙어서 다른 가능성을 상상하는 인물들은 지속적으로 실마리를 던지는 것 같기도 하다. '바냐 아저씨'의 말미에 괴로워하는 바냐 삼촌에게 던지는 소냐의 대사는 오래도록 남아 우리를 품고 있다.

소냐 : 바냐 아저씨, 우린 살아야 해요. 길고도 긴 낮과 밤들을 끝까지 살아 가요. 운명이 우리에게 보내 주는 시련을 꾹 참아 나가는 거예요. 우리, 남들을 위해 쉬지 않고 일하기로 해요. 앞으로도, 늙어서도. 그러다가 우리의 마지막 순간이 오면 우리의 죽음을 겸허히 받아들여요. 그리고 무덤 너머 저 세상으로 가서 말하기로 해요. 우리의 삶이 얼마나 괴로웠는지, 우리가 얼마나 울었고 슬퍼했는지 말이에요. 그러면 하느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실 테죠. 아, 그날이 오면, 사랑하는 아저씨, 우리는 밝고 아름다운 세상을 보게 될 거예요. 기쁜 마음으로, 이 세상에서 겪었던 우리의 슬픔을 돌아보며 따스한 미소를 짓게 될 거예요. 그리고 마침내 우린 쉴 수 있을 거예요. 나는 믿어요, 간절하게 정말 간절하게.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그의 두 손에 얹고는 지친 목소리로) 그곳에서 우린 쉴 수 있어요.

텔레긴이 나직하게 기타를 연주한다.

소냐 : 평화롭게 쉴 수 있을 거예요. 천사들의 날갯짓 소리를 들으며, 보석처럼 반짝이는 천상의 세계를 바라보면서요. 모든 악과 고통은 온 세상을 감싸는 위대한 자비의 빛 속으로 가라앉게 될 거예요. 그날은 평화롭고 순수하고 따스할 거예요. 난 믿어요. 굳게 믿어요. (눈물을 닦는다) 불쌍한 바냐 아저씨, 울고 계시군요. (흐느낀다) 아저씨는 평생 행복이 뭔지 모르고 살아오셨죠. 하지만 기다려요, 바냐 아저씨, 기다려야 해요. 우리는 쉴 수 있을 거예요. (그를 껴안는다) 쉴 수 있어요.

야경꾼의 딱따기 소리가 들린다.
텔레긴이 나직하게 기타를 연주한다. 마리야는 소책자 여백에 무언가를 적고 있다. 마리나는 양말을 뜨고 있다.

소냐 : 쉴 수 있어요.

ㅡ막ㅡ

사진=을유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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