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노희 UCLA 명예학장 겸 석좌교수가 지난달 25일 서울 중구 을지로(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이데일리와 단독 인터뷰 중이다. (사진=김지완 기자)
이데일리는 지난달 25일 서울 중구 을지로(소공동) 롯데호텔에서 박 학장을 만나 전쟁통에 말을 더듬던 소년은 어떻게 세계 무대 과학자가 됐고, 18년간 거대 조직을 이끈 학장이 됐는 지에 대해 들어봤다,
저자와 대화는 한 사람의 회고를 넘어, 좌절과 방황 속에 있는 젊은이들에게 길을 제시했다.
◇전쟁·가난·말더듬 딛고 우뚝
1944년생인 그는 1950년 3월 초등학교에 입학했으나, 불과 석 달 만에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학업이 끊겼다.
“피난지에서 인민군에게 김일성 찬가를 배우고 개구리를 잡아 구워 먹었습니다”는 것이 그의 기억 속 전쟁 풍경이다.
1953년 전쟁이 끝나면서 초등학교 3학년으로 학업을 재개했지만, 1학년 2학기와 2학년 과정을 건너뛴 탓에 수학수업에서 분수조차 어렵게 느껴졌다. 세 살 많은 또래들과 같은 반에서 위축된 그는 스스로를 ‘바보’라 자책하기도 했다.
게다가 말더듬이 때문에 교실에서 책을 읽는 시간이 공포였고, 놀림도 잦았다.
학업의 리듬을 되찾기 시작한 것은 중학교 2학년 무렵이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결심으로 영어 문법서를 붙잡으며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이후 성적은 눈에 띄게 올랐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모의고사 전교 1등을 차지했다.
“서울대 의대는 장학금을 받을 만큼 1등을 유지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해 차선으로 치대를 선택했습니다. 등록금과 생활비는 장학금과 과외로 충당했습니다.”며 대학생활을 떠올렸다.
학부 시절, 그는 연구 동아리 ‘연우회’에 발을 들였다. 이곳에서 맡은 첫 발표는 생애 처음으로 사람들 앞에 서는 자리였다.
박 학장은 “말을 더듬던 내가 학생들 앞에서 학술 발표를 한다는 건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두려움을 넘어서자 오히려 연구의 맛을 알게 됐습니다”고 회상했다.
◇끝없는 연구 열정에 도미 10년만 정교수
그는 학부 시절 ‘사진처럼 기억하는 능력’으로 주목받았다. 교과서를 통째로 암기해 책 한 권 없이도 강의실에 들어가 4시간 연속 강의를 할 수 있었다.
“책 한 장 한 장이 눈앞에 그대로 떠올랐습니다. 교재 없이도 도식과 문장을 줄줄이 설명할 수 있었습니다. 후배 강의를 도맡으며 ‘내가 학문에 맞는 길을 가고 있다’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대학원에 진학한 뒤에도 열정은 식지 않았다. 군 복무와 시대적 혼란 속에서도 연구 노트를 손에서 놓지 않았고, 결국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초기에는 항바이러스제의 작용 메커니즘을 밝히는 연구에 집중했으나, 곧 암 연구로 방향을 틀며 국제 학계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날마다 실험실에서 살다시피 했습니다. 어느 순간 눈을 떠보니 제 이름이 논문과 학회에 오르내리고 있더군요. ‘자고 일어나니 유명해졌다’는 말이 과장이 아니었습니다.”
하버드와 UCLA로 이어지는 커리어는 가파르게 솟구쳤다. 말더듬이 소년은 어느새 세계 무대에서 강연하는 학자가 돼 있었다.
미국으로 향한 지 정확히 10년 만에 그는 조지아대, 하버드대 2곳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조교수, 부교수를 거쳐 정교수 자리에 올랐다.

(제공=다반)
◇최장수 학장? 연구는 이상, 경영은 현실
18년간 UCLA 치과대학을 이끈 박노희 명예학장은 학장의 역할을 단순한 학문적 리더가 아닌 ‘CEO’로 규정했다.
그는 연구는 이상(理想)으로, 경영은 현실(現實)을 직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예산의 14%만 정부 지원이었습니다. 나머지는 기금, 펀드, 자체 프로그램으로 채워야 했죠.”
그는 미국밖 치과의사 대상 교육과정, 편입·전문과정 등 ‘돈 버는 프로그램’을 설계했고, “재임을 마칠 때 기금 5000만달러(700억원)를 유치했습니다. 현금 4500만달러(630억원)를 후임에게 남겼습니다”고 회고한다.
박 학장은 학자형 리더의 한계를 지적하며 “리더십은 연구만으론 안 되고, 재정과 조직 운영을 통해 ‘연구가 지속될 토대’를 만드는 일”이라고 단언했다.
대학 리더십에 대해선 “노벨상 수상자 출신 총장이라도 재정·조직을 못 굴리면 학교는 가난해진다”며, ‘학문+경영’의 이중 역량을 강조했다.
그가 말하는 ‘리더의 3가지 캠페인’ 정책·조직 변화를 관통하는 프레임은 간결하다.
△정치 캠페인(Political): 핵심 20% 이해당사자를 먼저 설득한다. △마케팅 캠페인(Marketing): 메시지를 공개해 다수 지지를 모은다. △군사 캠페인(Military): 마지막에 실행한다.
“순서가 바뀌면 실패합니다. 먼저 사람을 얻고, 그다음 여론을 열고, 마지막에 집행해야 합니다.”
그의 화두는 ‘레질리언스’(회복탄력성)로 수렴한다.
“말더듬, 전쟁, 가난, 유학, 언어, 제도와 충돌…. 환경이 어떠하든 좌절하지 말고 뚫고 나가야 합니다.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좌절하지 않고 작은 무대를 계속 넘어섰기 때문입니다.”
책 제목처럼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그 길을 끝까지 갈 수 있습니다.”
그는 ‘타고난 천재’라기보다, 실패와 두려움의 층을 하나씩 돌파해낸 실행가였다. 인터뷰 내내 반복된 단어는 ‘사람’, ‘신뢰’, ‘약속’, 그리고 ‘연구’였다.
갈 길을 잃은 국내 연구·의료 리더십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묻는 이들에게, 책을 통한 그의 증언은 사용설명서가 돼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