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우의 ‘누드(남자)’(1926).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프랑스 파리에서 유학하던 시기(1925∼1928)에 그렸다. 아카데믹한 소재와 방식으로 인물화를 주로 그렸던 초기의 작업이다. 작품 속 탄탄한 근육을 가진 서양인 남성모델은 비스듬히 앉아 슬쩍 세운 왼쪽 무릎에 두 팔을 얹고 있다. 나부끼듯 늘어뜨린 붉은 장막과 주황 장막이 근육질 남성의 운동성을 더욱 도드라지게 한다. 전체적으로 어두운 분위기 속에서 어슴푸레 빛을 받고 있는 탄탄한 육체를 작가는 세밀한 데생과 사실적인 묘사로 강조하고 있다. 지난 5월 1일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개막한 ‘MMCA 과천 상설전: 한국근현대미술Ⅰ’에 나왔다. 캔버스에 유화 물감, 78×62㎝.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정하윤 미술평론가] 1899년 황해도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남들이 보기엔 호화로운 삶을 누리는 부잣집 도련님이었지만 마음속에는 남몰래 타오르는 불씨가 있었다. 그것은 ‘서양화’였다. 낯설고 먼 세계의 그림에 매료된 그는 미술에 대한 호기심과 모험심을 품고, 아무도 걷지 않은 길로 조용히 첫발을 내디뎠다.
이종우(1899∼1981)는 평양고등보통학교 재학시절 일본인 미술교사를 통해 처음으로 그림을 접했다. 수채화를 배우며 그린 작품이 대회에서 상을 받자 그림에 대한 흥미는 점점 깊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일본인 화가가 유화로 모란봉을 그리는 모습을 우연히 보게 됐다. 눈앞의 풍경보다 캔버스 속 모란봉이 더 아름답게 빛나는 그 순간, 이종우는 결심했다. 서양화를 배워야겠다고.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이종우는 마침내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미술을 배우겠다고 하면 부모님이 반대할 것이 분명했기에 법학을 공부하겠다고 거짓말을 하고 떠난 길이다. 1917년 교토 간사이미술연구소에서 데생 등 미술의 기초를 다시 익힌 그는 이듬해 당시 최고 명문이던 도쿄미술학교에 입학했다. 법을 배운다는 거짓말은 곧 들통이 났지만 부모님이 아들의 지원을 멈추진 않았다. 황해도 일대 광대한 토지에서 막대한 자산을 쌓은 집안이었을 뿐 아니라 학교 설립과 학회 기부에 아낌이 없던 계몽적인 가풍 덕분이었다. 그 덕에 이종우는 일본 주최 전람회에 작품을 출품해 이름을 알리면서 무사히 학업을 마칠 수 있었다.
◇서양화에 빠진 조선 청년, 꿈의 도시 ‘파리’로
일본 미술학교에서 실력을 쌓은 이종우는 1923년 고국으로 돌아왔다. 이듬해 열린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 작품을 출품해 3등상을 받으며 화가의 길로 들어섰다. 그러나 ‘선전’이 일제강점기 문화통치를 미화하기 위한 전시였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는 이후 다신 그곳에 작품을 내지 않았다.
대신 이종우는 한 번 더 유학길에 올랐다. 이번에는 미술의 본고장 프랑스 파리였다. 일본 유학시절 그는 많은 일본인 스승이 파리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것을 보며 줄곧 그 도시를 동경해왔다. 이종우뿐 아니라 당시 일본 유학생 중에는 파리를 꿈꾸는 화가들이 많았다. 그러나 시대의 제약 탓에 실제로 그 길을 떠난 이는 없었다. 이종우는 조선인 최초로 파리로 유학을 떠난 학생 화가가 됐다.
훗날 이종우는 프랑스 유학에 대해 “미술에 대한 욕구나 집착이 절실해서가 아니라 부잣집 아들의 세상을 향한 호기심 때문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이는 지나치게 겸손한 말이었다. 아무리 부잣집 자제라 해도 식민지 조선의 청년이 단순한 호기심만으로 머나먼 파리행을 결심하기란 쉽지 않았다. 미술을 배우겠다고 부모를 속이고 일본과 조선의 전람회에 잇따라 이름을 올린 그는 사실 미술에 대한 누구보다 뜨거운 열정을 품고 있었을 것이다.
이종우의 파리생활은 풍족하고 여유로웠다. 당시 파리에 머물던 한국 유학생들이 학비와 생활비로 고생하던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고급 술집에서 밤새 코냑을 마실 만큼 넉넉했으며 하숙집은 자연스레 유학생들의 아지트가 됐다. 일요일이면 함께 고깃국을 끓여 먹으며 낯선 타국살이의 외로움을 달랬다.
이종우의 ‘인형 있는 정물’(1927). 프랑스의 권위 있는 미술전 ‘살롱 도톤’에서 입선(1927)한 한국인 최초의 유화다. 1903년 창단한 살롱 도톤은 파블로 피카소, 앙리 마티스, 모리스 드 블라맹크 등 당시 혁신적 작가들이 참여해 근대 회화사의 흐름을 바꾼 새로운 미술지향. 그만큼 작품에선 수상 이상의 의미까지 챙길 수 있다. 흰색과 녹색을 주조로 한 인형·꽃 등 명랑한 분위기를 뒤쪽의 거울·벽에 묻힌 어두운 갈색이 가라앉히며 균형을 잡고 있다. 같은 해 살롱 도톤에서 입선한 작품으론 ‘모부인의 초상’(2027)도 있다. 캔버스에 유화 물감, 53.3×45.6㎝.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노력한 만큼 성과도 뒤따랐다. 파리에 도착한 지 2년 만인 1927년 이종우는 프랑스의 권위 있는 전시회 ‘살롱 도톤’에 입선했다. 파블로 피카소, 앙리 마티스 등 거장들이 참여하던 전시였다. 한국인으로는 처음이었다. 입선작 중 하나인 ‘인형 있는 정물’(1927)은 녹색과 흰색을 주로 사용해 화면에 생동감을 전한다. 중앙의 하얀 옷을 입은 인형이 담긴 유리상자에서는 작가의 섬세한 묘사력이 돋보인다.
흥미롭게도 이종우의 파리시절 작품들은 일본 유학시절보다 오히려 더 고전적이다. 일본에서는 붓터치를 살려 약간의 표현성을 드러냈지만 파리에서는 사실적인 묘사에 집중했다. 화려한 실험보다 정교한 재현에 마음을 기울인 것이다.
◇파격의 서양인 남성모델 누드화…“춘화냐” 비난받기도
1920년대 후반의 파리는 제1차 세계대전의 상처 위에서 다시 태어나던 예술의 용광로였다. 젊은 작가들은 이성의 한계를 절감하며 우연과 도발의 미학을 추구했고, 다다의 여파 속에서 초현실주의가 막 피어나던 시기였다. 그러나 이종우는 이러한 새로운 미술의 흐름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 격동의 한복판에서도 그는 정물화, 풍경화, 인물화 등 전통적인 형식에 몰두했다.
시대로 보면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조선에서 서양화는 ‘닭똥냄새 난다’는 핀잔을 들었고, 누드화를 그리면 ‘춘화냐’는 놀림을 받기 일쑤였다. 그런 환경에서 온 이종우로서는 서양 남성의 누드화를 그린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파격적이라고 느꼈을 것이다. 그만큼 시대적 간극은 멀고도 깊었다.
파리에서 3년간 공부를 마친 이종우는 1928년 귀국해 개인전을 열었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기대만큼 호평을 받지 못했다. 파리 분위기가 너무 짙게 배어 있던 탓일까. 평론가들은 하나같이 ‘조선의 느낌’을 요구했다. 실망스러웠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동양화의 표현방식을 서양화에 접목할 방법을 모색하며 화단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화가로 활동하는 한편, 1929년부터는 중앙고보 미술교사로 재직하며 제자들을 길렀다. 1950년 홍익대 미대로 자리를 옮길 때까지 이마동, 구본웅, 김용준, 길진섭, 김종태 등 훗날 한국미술사를 이끈 굵직한 화가들이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
이종우의 ‘풍경’(1956). 앞쪽 나무, 중간의 물과 산, 또 하늘과 수면에 걸친 빛의 울림을 조화롭게 구성했다. 작가의 작품 경향은 초기의 고전적 사실주의 화풍, 후기의 동양화 남화적 감성이 깃든 자연관조적인 화풍으로 크게 구분된다. 나무둥지에 드리운 사실적인 부피감, 가지·잎에 올린 활달한 필세 등이 후기로 나아가기 이전 단계, 초기와 후기의 중간쯤 놓인 작품임을 알린다. 캔버스에 유화 물감, 117×72.7㎝.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설령 그 평가가 맞다 해도 1세대 서양화가로서 평생 붓을 놓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의 존재는 특별하다. 당시 대부분 초기 서양화가들은 화업을 오래 이어가기 어려웠다. 1호 서양화가 고희동(1886∼1965)은 미술행정가로 전향했고, 2호 김관호(1890∼1959)는 일본 유학에서 귀국한 뒤 잠시 활동하다 붓을 내려놓았다. 3호 김찬영(1889∼1960)은 그림보다 골동품과 영화산업에 더 마음을 쏟았고, 4호 나혜석(1896∼1948)은 방랑생활 끝에 결국 길 위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만큼 화가로 살아간다는 것이 쉽지 않은 시대였다.
그런 가운데 말년까지 붓을 놓지 않은 이종우의 삶은 단순한 화가의 여정을 넘어 한국 근대 서양화의 초석을 다진 기록으로 남는다. 누구보다 먼저,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을 찾아 프랑스로 향했고, 파리 무대에서 최초로 조선인의 이름을 새겼다. 이후 시대의 풍파 속에서도 자신의 길을 굳건히 지켰다.
꾸준함이야말로 가장 큰 재능이 아니던가. 이종우는 그 꾸준함으로 한국 서양화의 문을 열고 끝까지 지켜낸, 반드시 기억해야 할 또 한 명의 화가다.
화가 이종우. 사진작가 육명심(1933∼2025)이 1972년부터 제작한 ‘예술가의 초상 시리즈’ 중 ‘이종우’(1979·2021 인화)다. 굳이 작업실이 아닌 집안에 편하게 앉은 모습을 포착해 인간적인 면모가 도드라지게 했다. 종이에 디지털잉크젯프린트, 76.2×50.7㎝.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1983년생. 그림은 ‘그리기’보단 ‘보기’였다. 붓으로 길을 내기보단 붓이 간 길을 보려 했다는 얘기다. 예술고를 다니던 시절 에른스트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에 푹 빠지면서다. 이화여대 회화과를 졸업했지만 일찌감치 작가의 길은 접고, 대학원에 진학해 한국미술사학을 전공했다. 내친김에 미국 유학길에 올라 캘리포니아주립대 샌디에이고 캠퍼스에서 중국현대미술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한 이후 연구와 논문이 주요 ‘작품’이 됐지만 목표는 따로 있다. 미술이 더 이상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란 걸 알리는 일이다. 이화여대·국립중앙박물관 등에서 미술교양 강의를 하며 ‘사는 일에 재미를 주고 도움까지 되는 미술이야기’로 학계와 대중 사이에 다리가 되려 한다. 저서도 그 한 방향이다. ‘꽃피는 미술관: 가을·겨울’(2025), ‘꽃피는 미술관: 봄·여름’(2022), ‘여자의 미술관’(2021), ‘커튼콜 한국 현대미술’(2019), ‘엄마의 시간을 시작하는 당신에게’(2018)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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