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 선 관람객에 '감탄', 꾹 닫힌 지갑에 '탄식'…갈라진 미술시장

생활/문화

이데일리,

2025년 12월 31일, 오전 11:49

[‘2025년 미술계’ 한 장면①] 단일 전시로 한 해 동안 가장 많은 관람객이 찾은 ‘론 뮤익’ 전 전경. 4∼7월 서울 종로구 삼청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이어간 전시기간 동안 53만 3035명이 들렀다. 단연 크기로 압도한 한 점은 ‘침대에서’(2005)였다. 심란한 표정으로 한 손을 턱에 괴고 침대에 누운 한 여인을 옮긴 작품은 길이 650㎝, 폭 395㎝, 높이 162㎝에 달한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희한한 풍경이다. 한쪽에선 연신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다른 한쪽에선 연거푸 한숨을 뿜어댄다. 그 ‘한쪽’은 미술작품이 걸린 대형 전시장이고, ‘다른 한쪽’은 미술작품을 팔고 사는 화랑·경매장이다. ‘한쪽’은 넘쳐나는 관람객을 바라보며 감탄을 쏟아냈고, ‘다른 한쪽’은 여전히 열리지 않는 지갑을 엿보며 탄식을 감추지 못했다.

극명하게 분위기가 갈린 이 풍경은 ‘2025년 대한민국 미술계’라는 그림에서 나왔다. 정상적인 형태라면 보통은 한 톤이어야 한다. 밝은 톤이든 어두운 톤이든. 그런데 한 화면에서 말이다. 장밋빛과 회색빛이 공존한 모양새니 희한하다고 할 수밖에. 이쯤 되면 ‘동종업계’라는 말을 쓰는 것도 어색할 지경이다.

냉정히 따져보면 이 ‘투 톤’은 작품전시장과 작품판매장, 두 영역을 가른 것만도 아니었다. 전시 중에서는 블록버스트급 전시의 흥행이 도드라졌고, 판매 중에서는 수십억원대의 최고가 작품이 시장을 이끌었다. ‘빈익빈 부익부’가 더욱 선명했던 한 해였단 얘기다.

①앞다퉈 관람객 수 발표…국립현대미술관 웃었다

사실 연초부터 예상은 했던 일이다. 유독 시선을 끄는 대형전시에 대한 예고편이 넘쳐났더랬다. 겸재 정선(1676∼1759), 마르크 샤갈(1887∼1985), 루이즈 부르주아(1911∼2010), 김창열(1929∼2021), 론 뮤익(67), 마크 브래드포드(64), 이불(61) 등 이름만으로도 화제를 몰고 다니는 거장의 행렬이었다. 게다가 고전부터 근대를 찍고 현대에 가닿은 고른 분포도 얘깃거리가 됐다. 결과는 예상대로 이어졌다.

[‘2025년 미술계’ 한 장면②] 현대미술의 거장 루이즈 부르주아의 70여년 작품세계를 좇는 대규모 회고전 ‘루이즈 부르주아: 덧없고 영원한’ 전 전경. 일생을 짓누른 증오·분노·우울 등을 조각·회화·설치작품 등에 녹여내며 되레 트라우마에 손을 내밀었던 작가다.경기 용인시 호암미술관에 설치된 부르주아의 걸작 중 청동조각 ‘웅크린 거미’(2003). 부르주아가 제작한 퍼포먼스 영상(1978)을 배경으로 섰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벚꽃 시즌에 개막한 ‘겸재 정선’(호암미술관 4∼6월), ‘론 뮤익’(국립현대미술관 4∼7월)이 시작이었다. 오랜만에 찾아온 ‘미술의 봄’을 만끽하려는 관람객들이 줄을 이었다. 더운 바람이 불어오면서 ‘마르크 샤갈 특별전’(예술의전당 5∼9월)이 바통을 이어받았고, 가을을 알린 ‘2025 키아프·프리즈’를 전후해선 불이 붙었다. ‘마크 브래드포드: 킵 워킹’(아모레퍼시픽미술관 8∼1월), ‘루이즈 부르주아: 덧없고 영원한’(호암미술관 8∼1월), ‘김창열’(국립현대미술관 8∼12월), ‘이불: 1998년 이후’(리움미술관 9∼1월) 등이다.

관람객 수를 집계한 뒤 떠들썩한 자축을 벌인 곳은 국립현대미술관이다. 2025년 한 해 관람객 수 337만명을 넘기며 “개관 이래 최다”라고 발표했다. 지난해에 비해 15%가량 증가했다. 흥행을 이끈 전시는 ‘론 뮤익’ 전. 53만 3035명이 봤다. 사실 수치로 보면 국립중앙박물관이 압도적이다. 역시 개관 이래 처음으로 ‘한 해 관람객 600만명’을 넘기고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눈치다. ‘케데헌’ 열풍을 제대로 탔다. 뮷즈(뮤지엄굿즈)를 사기 위해 오픈런 하는 진풍경까지 끌어냈다. 하지만 이렇다 할 기획전 없이 만든 성과라 ‘전시’로 볼 땐 평가가 엇갈릴 수밖에 없다.

열심히 따져보지 않아도 흥행전시 면면에선 ‘자본’의 향기가 풍긴다. 비용을 들인 만큼 좋은 성적을 낸다는 암묵적 공식을 확인했던 것도 2025년 전시풍경의 일부다.

[‘2025년 미술계’ 한 장면③] 이 시대를 대표하는 현대미술 작가로 꼽히는 마크 브래드포드의 ‘떠오르다’(Float 2019) 부분. 서울 용산구 아모레퍼스픽미술관 전시장의 한 바닥 전체를 덮은 회화설치작품이다. 거리에서 주은 전단지·포스터·신문지 등을 긴 띠로 잘라내고 노끈으로 이어냈다. ‘본다’를 넘어 ‘밟고 걸어야’ 감상했다고 할 작품은 ‘계속 걷다’란 뜻의 ‘킵 워킹’(Keep Walking)이란 전시 타이틀과 이어진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②샤갈 안 팔렸다면…수치만 끌어올린 경매시장

북적거리는 전시장과는 달리 미술작품을 팔고 사는 현장에는 한 해 내내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 작품이 팔릴까’ 노심초사할 수밖에 없었단 얘기다. 그도 그럴 것이 국내 갤러리·아트페어 관계자들에게 ‘올해 매출’을 물었더니 응답자(154명) 중 절반 가까이(48.4%)가 “지난해보다 감소했다”고 대답했다(예술경영지원센터 ‘2025 한국 미술시장 결산 및 2026년 전망’). “증가!”를 외친 응답자는 10%도 채 안 됐지만(9.7%) 그 증가도 대단하지 않다. 1억~10억원 사이의 매출이 60%라니 말이다.

체감하는 미술시장은 여전히 바닥이지만 그나마 경매시장의 수치가 가까스로 오름세를 탔다. 서울옥션·케이옥션을 포함해 국내 8개 경매사가 2025년 한 해 동안 진행한 온·오프라인 미술품 경매의 낙찰총액은 1405억원(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 ‘2025 국내 미술품 경매시장 결산’). 지난 5년간 뚝뚝 떨어지기만 하다가 간신히 유턴해 끝자락에 안착한 거다. 2024년(1151억원)보다 254억원이 증가했지만 2023년(1535억원)에는 못 미친다. 호황 붐을 타고 최고점을 찍었던 2021년(3294억원)에 비하면 43% 수준이다.

[‘2025년 미술계’ 한 장면④] 11월 서울 강남구 서울옥션 ‘이브닝 세일’ 에서 마르크 샤갈의 ‘꽃다발’(Bouquet de Fleurs 1937, 100.4×73.2㎝)이 낙찰되는 순간. 94억원을 부른 새 주인에 안긴 ‘꽃다발’은 국내 미술품 경매사상 가장 비싸게 팔린 작품으로 등극했다. 같은 날 함께 출품한 샤갈의 또 다른 작품 ‘파리의 풍경’(Paysage de Paris 1978)은 59억원에 낙찰됐다(사진=서울옥션).
그런데 그 늘어난 ‘254억원’이 말이다. 낙찰작 최상위 몇 작품만 더하면 나올 만한 수치라는 거다. 지난 11월 서울옥션에서 팔려나간 샤갈의 작품 두 점이 가장 크다. 국내 미술품 경매사상 최고가를 쓰며 94억원에 낙찰된 ‘꽃다발’(1937), 같은 날 59억원에 팔린 ‘파리의 풍경’(1978), 이미 이 두 낙찰가만으로 153억원이다. 게다가 이날 경매는 정기적인 메이저 경매가 아닌 서울옥션이 ‘긴급 편성’한 ‘이브닝 세일’이었던 점도 주목할 만하다. 다시 말해 정상적으로 위기를 벗어난 것처럼 보이질 않았다는 얘기다.

물론 끝없던 침체기를 벗긴 수치만으로도 기대를 키운다. 출품작은 떨어졌지만(1만 8339점, 2024년 2만 2934점) 낙찰률이 상승한 점도 고무적이다(53.42%, 2024년 46.40%). 하지만 아직 장담은 어렵다. 미술계 한 관계자는 “초고가 작품 몇 점이 팔린 것으로 미술시장 회복세를 진단하는 건 섣부르다”며 못을 박았다. “결국 중저가 작품에 대한 관심과 판매가 이후 판도를 결정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③키아프, 프리즈 5년 연장에 안도…여전한 과제에 답 찾아야

한 해 중 가장 떠들썩하게 치러지는 아트페어 ‘키아프 서울 2025’와 ‘프리즈서울 2025’가 약속한 공동개최 5회 중 4회째 행사를 치렀다. 국내 최대 미술장터인 키아프는 8만 2000여명, 세계적 아트페어인 프리즈는 7만여명의 관람객을 맞았다. 2024년과 거의 비슷한 수준이었다. 이후 관심은 2022년 ‘키아프리즈’로 처음 손을 잡은 두 페어가 계약을 연장할 것인가의 여부에 모아졌더랬다.

[‘2025년 미술계’ 한 장면⑤] 9월에 열린 ‘2025 키아프리즈’ 중 ‘프리즈 서울’ 전경. 한 관람객이 하우저앤워스 부스에 걸린 조지 콘도의 ‘퍼플 선샤인’(Purple Shunshine, 2025)을 오래도록 지켜봤다. 이 작품은 120만달러(약 16억 7000만원)에 판매됐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결론은 “다시 5년 연장”으로 났다. 아시아시장을 공략할 기반으로 서울을 선택한 프리즈나 인적 네트워크든 벤치마킹이든 프리즈 덕을 톡톡히 본 키아프가 서로를 필요로 한 ‘시너지 효과’를 택했다는 거다.

프리즈보다 마음이 급했던 키아프는 일단 안도하는 눈치다. “글로벌 경쟁력을 강화하고 국내 갤러리와 작가들의 해외진출을 지원하겠다”고 의지를 불태웠다. 하지만 과제는 여전하다. 지난 4회차를 통해 얼추 겉모양은 갖췄으나 ‘프리즈와 체급 차 극복’은 큰 숙제라서다. 사실 수십∼십수억원에 달하는 고가작품의 거래는 거의 프리즈에서 이뤄졌으니까. “프리즈와 협업으로 되레 한국 미술시장의 정체성을 잃는 건 아닌가” 하는 우려에도 뾰족한 답도 찾아내야 한다.

2025년과 2026년이 갈라지는 길목에서 미술시장 전문가들은 지나친 낙관론을 경계한다. “불황이 이어진다, 아니다를 가늠할 확실한 신호는 아직 어디에도 없다”며 “2026년이 중요한 분수령이 될 듯하다”고 입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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