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에 남은 아버지의 얼굴…피천득 수필집, 문학전집으로 만난다

생활/문화

이데일리,

2026년 1월 07일, 오전 08:30

[이데일리 이윤정 기자] “훗날 내 글을 읽는 사람이 있어 ‘사랑을 하고 갔구나’ 하고 한숨지어 주기를 바란다. 나는 참 염치없는 사람이다.”

피천득의 수필집 ‘악수도 없이 헤어졌다’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으로 출간됐다. 이번 책은 기존 수필집 ‘인연’을 바탕으로, 자식에게 보낸 미공개 편지들을 새롭게 더해 구성했다.

수록된 편지들은 ‘수영이에게’라는 파트로 묶였다. 딸 ‘서영이’에 대한 극진한 사랑으로 널리 알려진 피천득의 또 다른 얼굴, 아들을 향한 담담하고 절제된 애정을 처음으로 보여 주는 기록이다. 이 편지들은 피천득 문학을 이루는 정서의 지평을 한층 넓히며, 작가의 삶과 글을 보다 입체적으로 조망하게 한다.

제목 ‘악수도 없이 헤어졌다’는 피천득의 대표 수필 ‘인연’에 등장하는 한 구절에서 따왔다. 그는 이 글에서 어떤 만남들은 애초에 스쳐 지나갔어야 했고, 어떤 관계들은 조용히 물러났어야 했다고 말한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했을 인연’이라는 고백 뒤에 이어지는 이 문장은 인연의 빛이 아니라 그 본질에 깃든 그림자를 드러낸다. 우리가 인연이라 부르는 많은 관계가 실은 악수조차 나누지 못한 채 끝나 버리는 ‘미완의 문장’일 수 있음을 환기시키는 대목이다.

피천득(1910~2007)은 한국의 시인이자 수필가, 영문학자이자 번역가다. 식민지와 전쟁, 분단과 산업화를 거친 격동의 시대 속에서도 그는 시대의 구호보다 개인의 감정과 일상을 신뢰했다. 그의 글은 근대적 개인으로 살아간 한 인간의 태도와 윤리를 고요하게 증언하며, 근대 문학의 핵심인 ‘개인의 탄생’이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생각되고 실제 삶 속에서 나타났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으로 평가받는다.

단정하고 절제된 문장으로 빚어낸 투명한 서정은 한국 수필 문학의 미학적 기준이 됐다. ‘인연’ ‘나의 사랑하는 생활’ ‘오월’ ‘은전 한 잎’ 등으로 대표되는 작품들은 작고 아름다운 것들을 사랑했던 피천득의 수필 정신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이번 책에서는 피천득이 미국 미네소타주 덜루스 클리닉에서 신생아 전문의로 일하던 아들 피수영에게 보낸 편지를 만나볼 수 있다. 편지에는 아들을 향한 걱정과 염려, 자식들을 멀리 두고 살아야 했던 노년의 적적함, 그리고 절제된 말 속에 숨은 깊은 애정이 고스란히 담겼다. 이는 그간 문학 속에서 좀처럼 드러나지 않았던 ‘아버지로서의 피천득’을 조용히 비추는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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