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고리오 11세의 이상적인 로마 귀환 (출처: 조르조 바사리,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1377년 1월 17일, 교황 그레고리오 11세가 성 베드로 성당에 입성하며 약 70년간 이어진 '아비뇽 유수'의 시대가 끝났다. 프랑스 아비뇽에 머물던 교황청이 로마 교구로 복귀함에 따라 유럽의 종교적 중심지가 본래의 자리를 되찾았다.
지난 1309년 클레멘스 5세가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아비뇽으로 거처를 옮긴 이후, 역대 교황들은 로마를 비웠다. 이 기간 교황청은 프랑스 왕실의 간섭을 피할 수 없었다. 또한 교회의 세속화와 부패에 대한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주인을 잃은 로마는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쇠퇴를 겪으며 황폐해졌고, 서구 기독교 세계의 위상은 크게 흔들렸다.
그레고리오 11세가 귀환을 결심한 배경에는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의 강력한 권고가 있었다. 카타리나는 교황에게 "로마의 목자가 양 떼 곁으로 돌아와야 한다"며 분열된 교회를 수습할 것을 촉구했다. 또한 이탈리아 내 교황령의 정치적 불안정을 해소하고 영토에 대한 통제권을 회복해야 한다는 전략적 판단도 이번 귀환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아비뇽의 유수 종식은 교황권이 세속 군주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본연의 자리인 로마를 회복했다는 점에서 상징적 의미가 크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가톨릭교회 역사상 최대의 위기인 '서구 대분열'의 도화선이 되기도 했다.
아비뇽 유수 종식 직후, 로마파와 아비뇽파로 교황이 나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이는 교황의 영적 권위를 심각하게 실추시켰다. 각국 국왕들이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특정 교황을 지지하게 함으로써 보편적 종교 권력이 국가 단위로 파편화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결국 아비뇽 유수의 종식은 중세 교황 중심주의의 몰락을 가속화했다. 교회 내부에서는 교황보다 공의회의 권위를 우위에 두려는 공의회 중심주의가 대두됐다. 이는 훗날 종교개혁의 사상적 토양을 마련하는 역사적 전환점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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