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은 당신이란 장독에서 꺼낸 묵은지 같다"…김치가 만든 두 번째 가족

생활/문화

뉴스1,

2026년 1월 23일, 오전 11:16

[신간] 장지연 장편소설 '오로라 맨숀'

장지연의 장편소설 '오로라 맨숀'은 재건축도 못 하는 낡은 맨숀을 배경으로, 자립준비청년과 독거노인이 김치 장사로 삶을 다시 세우는 과정을 그린다. 상처 난 사람들이 서로를 돌보며 '가족'이 되어 가는 길을 간단한 말과 따뜻한 장면으로 보여 준다.

막다른 골목 끝에 선 '오로라맨숀'은 오래된 상처를 품은 건물이다. 주민이 빠져나가고 벽은 갈라졌지만, 여전히 몇 사람의 하루가 이곳에 쌓인다. 6개월 치 월급을 받지 못한 자립준비청년 혜성과, 남편이 요양병원에 있고 외아들을 먼저 떠나보낸 독거노인 복자도 그중 한 사람이다.

혜성과 복자는 우연한 위기와 도움 요청을 계기로 엮이고, 냉면집에 복자의 김치를 납품하면서 '함께 사는 법'을 배운다. 김치는 단순한 반찬이 아니라 서로를 묶는 약속이 된다.

혜성은 동생 유성과 함께 살 투룸을 구하려면 밀린 월급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사장은 갑자기 세상을 떠난다. 장례식장에서 유족에게 사정을 말하려다 쫓겨난 혜성은 복자가 사는 맨숀으로 향한다.

같은 시각, 복자는 저혈당 쇼크로 쓰러진다. "누구라도 좋으니 제발 내게 사람을 보내주세요."라는 복자의 기도 직후 문이 열리고, 평생 믿어보지 못한 '가족'이 문 앞에 선다. 이 만남이 두 사람의 일상을 바꾼다.

김치 한 단지에서 장사는 시작된다. 복자가 담그고 혜성이 배달한다. 냉면집 손님들의 입소문이 퍼지며 '복자네 장독김치'가 동네 밥상으로 번진다. 김치는 사람들에게 추억과 위안을 건네고, 혜성은 "기억의 총량과 행복의 총량은 반비례한다"고 적었던 지난 날을 조금씩 고쳐 읽는다. 상처는 금세 낫지 않지만, 서로를 통해 '살아갈 이유'가 만들어진다.

맨숀에는 다양한 이웃이 산다. 관리소장 오영미, 전직 은행지점장 출신 경비 박찬배, 총알맨 일을 그만두고 김치 배송을 맡는 차성원, 다섯 마리 고양이와 사는 웹툰작가 가르마, 복자의 손녀이자 문신 디자이너 김아린까지. 각자의 생활고와 자존감 문제가 유머와 연민 사이에서 드러난다. '혼자 버티는 도시'에서 서로 기대는 장면이 만들어지고, 작은 일과 장사가 사람을 연결한다.

배경에는 오래된 도시의 제도 문제도 비친다. 오로라맨숀은 1974년 준공 이후 안전등급 D를 받았지만 인구 소멸을 이유로 재건축 허가가 나지 않는다. 폐물 취급받는 건물이 누군가에겐 마지막 보루다. 떠난 자들이 남긴 빈자리를 남은 사람들이 메우며 하루를 이어 간다. 소설은 제도나 통계를 앞세우지 않는다. 고장 난 엘리베이터, 새는 지붕, 밀린 관리비 같은 생활 장면으로 현실을 보여 준다.

작가는 "스스로를 무가치하다고 느끼는 인물들이 서로의 가치를 발견해 주는 이야기"를 만들고자 했다. "너 자신을 미워하지 말라… 가랑비에 옷 젖듯 그런 생각이 차곡차곡 쌓이면 결국 나 자신이 싫어지게 된다"라는 복자의 말은 그래서 오래 남는다.

△ 오로라 맨숀/ 장지연 지음/ 북레시피/ 1만 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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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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