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 고속도로 깔아줬다"…법의 허점 겨눈 펜 끝

생활/문화

이데일리,

2026년 1월 28일, 오전 05:10

[이데일리 이윤정 기자] “판결의 결과가 잠재적 범죄자에게 용기를 주거나, 추가 범죄를 부추기는 결과로 이어진다면 문제가 되지 않을까요?”

최근 장편소설 ‘4의 재판’을 출간한 도진기(59) 변호사는 “‘캄보디아 만삭 아내 살해사건’의 판결에 대해 아무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아 펜을 들었다”며, 이같이 밝혔다.

그가 쓴 ‘4의 재판’은 보험을 노린 계획 살인으로 추정되는 사건을 다룬다. 법에 문외한인 한 시민이 오로지 ‘살인자에게 법의 심판을 받게 하겠다’는 의지로 분투하는 과정을 그린 법정 미스터리다.

최근 서울 서초구 도진기변호사 사무실에서 만난 도 변호사는 “우리나라는 기본적으로 일반법원, 고등법원, 대법원 등 3심 재판제를 따른다”며 “재판에 동의하지 않는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또 다른 ‘4의 재판’을 추구한다는 의미를 담았다”고 설명했다.

도진기 변호사(사진=황금가지).
◇법조인과 작가 병행…“글쓰기는 힐링”

서울대 법대와 동 대학원을 졸업한 도 작가는 2017년 서울북부지법 부장판사를 끝으로 법원을 떠나 현재 변호사로 활동 중이다. 2010년 ‘선택’으로 한국추리작가협회 미스터리 신인상을, 2014년에는 ‘유다의 별’로 한국 추리문학 대상을 수상했다. 판사 출신답게 법정 안밖의 시선을 담은 법정소설로 주로 독자들을 만나왔다. 도 작가는 “법조인으로서의 경험과 작가로서의 시선이 서로 큰 도움이 된다”며 “경직된 법정과 달리 글쓰기는 스스로를 치유하는 시간”이라고 말했다.

이번 작품은 대중에 널리 알려진 ‘캄보디아 만삭 아내 사망 사건’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결혼을 앞둔 지훈이 오랜 친구 양길과 필리핀 여행 중 의문사하면서 사건은 시작된다. 지훈의 약혼녀 선재와 검찰은 사망보험금의 유일한 수익자가 양길이라는 정황을 토대로 그를 살인 혐의로 기소하지만, 결정적 증거가 없어 판결을 내리지 못한다. 선재는 재판이 길어질수록 진실을 밝히기보다 질서 유지를 우선하는 사법 시스템 앞에 깊은 회의를 느낀다.

‘캄보디아 만삭 아내 사망 사건’은 남편이 거액의 보험금을 노리고 교통사고를 일으켰다는 의혹에도 불구하고 형사 재판에서 무죄가 선고됐다. 이어진 민사 소송에서도 95억 원에 달하는 보험금 지급으로 큰 논란을 낳았다. 도 변호사는 “방송으로 사건을 접한 뒤 판결문을 모두 읽어봤다”며 “법원이 이런 판단을 사회에 던져놓아도 되는 건가 생각이 들 정도로 당혹스러웠다”고 언급했다.

보험금 판결을 둘러싼 법리적 비판이 이어질 것으로 예상됐지만, 실제로는 판결 결과를 전하는 보도만 남긴 채 사건은 빠르게 잊혔다. 작품의 원제였던 ‘살인 하이웨이’는 이런 현실에 대한 비판적 메시지를 담은 것이다.

도 변호사는 “형사상 무죄가 범죄 의심자에게 보험금 등 경제적 이득까지 취하도록 ‘살인 하이웨이’를 깔아주는 결과로 이어져선 안 된다”며 우려를 표했다. 이 같은 문제의식은 소설 속 인물의 대사에도 그대로 담겼다. 책에서 선재는 “사법부가 이 사회에 커다란 죄를 지었어. 법원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협력하면서 살인의 하이웨이를 탄탄하게 닦아놓은 거야”라고 말한다.

도진기 변호사(사진=황금가지).
현직 변호사가 쓴 소설인 만큼 재판 과정에 대한 묘사가 촘촘하게 살아 있다. 검사가 범죄 사실을 요약해 진술하는 장면이나, 변호사가 “증거 인부를 하겠다”며 법률 용어를 이어가는 대목에서는 실제 법정에 앉아 있는 듯 생생한 현장감이 전해진다.

도 변호사는 “법을 비판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설정한 이야기가 아니라, 모두 경험과 감정에서 나온 장면들”이라면서 “판결이 내려지는 순간 여론이 형성되는데 그 과정에서 피해자들은 어떤 마음일지 상상하며 글을 썼다”고 강조했다.

틈틈이 글을 쓴다곤 하지만 벌써 16번째 장편소설이다. 논픽션까지 포함하면 18번째 작품이다. 도 작가는 “법조인으로서 판결의 무게를 누구보다 잘 알기에, 그 이면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글을 쓰고자 했다”며 “재판 과정의 구조적 한계나 법의 사각지대를 예리하게 파고드는,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로 독자들과 계속 소통하고 싶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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