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수·민창기 서울성모병원 혈액병원혈액내과 교수(왼쪽부터)와 한승훈·최수인 가톨릭대학교 약리학교실교수(서울성모병원 제공)
난치성 혈액암인 다발골수종 환자에서, 암이 생기기 전 단계인 '전구질환(전구상태)'을 미리 발견하고 지속적으로 추적 관리한 경우 그렇지 않은 환자보다 사망 위험이 약 47%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증상이 나타난 뒤 치료를 시작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기존 접근과 달리, 전구 단계부터 병을 인지하고 관리한 경험 자체가 이후 치료 성적을 바꿀 수 있음을 보여준 결과다.
29일 박성수·민창기가톨릭대학교 서울성모병원 혈액병원 교수(혈액내과)와 한승훈·최수인 가톨릭대학교 약리학교실교수 연구팀은 2009년부터 2022년까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전 국민 보건의료 빅데이터를 활용해 다발골수종 환자의 진단 경로와 생존 결과를 분석한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이번 연구는 영국 옥스퍼드대 병원 혈액내과 카르티크 라마사미 교수와의 국제 공동 검증 연구로 진행됐다.
다발골수종은 골수에서 면역세포의 한 종류인 형질세포가 비정상적으로 증식하며 발생하는 혈액암이다. 악성림프종과 백혈병에 이어 발생 빈도가 높은 대표적인 혈액암으로, 국내에서는 매년 2000명 이상이 새로 진단된다. 뼈를 침범해 골절을 일으키거나 빈혈, 신부전, 감염 등 심각한 합병증을 동반하는 경우가 많고 재발이 잦아 환자들이 두려워하는 암으로 꼽힌다.
이 병은 대부분 갑자기 발생하지 않고 전구질환 단계를 거쳐 서서히 진행된다. 대표적인 전구질환이 단클론감마글로불린혈증(MGUS)이다. MGUS는 혈액 검사에서 비정상적인 단클론 면역글로불린(단백질)이 검출되지만, 아직 암으로 진단할 정도의 장기 손상이나 증상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또 다른 단계는 무증상 다발골수종으로, 이미 다발골수종에 해당하는 암세포가 관찰되지만 치료를 시작해야 할 합병증이 없어 경과 관찰만 하는 단계다.
이 시기에는 뼈 통증이나 빈혈 같은 뚜렷한 증상이 없어 환자 스스로 위험을 인지하기 어렵다. 그러나 전구질환 단계에서도 골수 내 형질세포는 서서히 증가하고, 신장 기능 저하나 뼈 손상 같은 변화가 누적될 수 있다. 연구진은 이처럼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시기에 정기적인 검사와 추적 관찰이 이뤄졌는지가, 이후 본격적인 치료를 시작할 때 환자의 신체 상태와 치료 여력을 좌우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연구팀은 이러한 가설을 검증하기 위해 전국 단위 데이터를 활용했다. 분석 대상은 MGUS 환자 5500명과 무증상 및 증상성 다발골수종 환자 1만 7809명이다. 이 가운데 △MGUS에서 다발골수종으로 진행한 환자 199명 △무증상 다발골수종에서 증상성 다발골수종으로 진행한 환자 447명 △전구질환 진단 없이 곧바로 다발골수종으로 진단된 환자 1만 5067명을 선별해 비교했다.
그 결과, MGUS를 거쳐 다발골수종으로 진행한 환자의 전체 생존기간 중앙값은 약 7.9년, 무증상 다발골수종을 거친 환자는 약 5.5년이었다. 반면 전구질환 진단 없이 바로 다발골수종으로 진단된 환자의 중앙 생존기간은 약 4.4년에 그쳤다. 전구 단계에서 병을 인지하고 추적 관리를 받은 두 집단이 그렇지 않은 환자군보다 유의하게 오래 생존한 것이다.
연구팀은 단순히 "더 일찍 발견했기 때문에 오래 산 것처럼 보이는 효과(lead-time bias)"를 최소화하기 위해, 모든 환자를 '증상이 나타나 본격적인 치료를 시작한 시점'부터 동일하게 추적했다. 그럼에도 MGUS 단계를 거쳐 진행한 환자의 사망 위험은 바로 진단된 환자보다 약 47% 낮았다. 전구질환 단계부터의 체계적인 관리가 실제 치료 예후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통계적으로 확인한 셈이다.
눈에 띄는 점은 실제 임상에서 전구질환 단계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다발골수종으로 진단되는 환자가 적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번 분석에서 전구질환 진단 없이 바로 다발골수종으로 진단된 환자는 1만 5000명 이상으로, 전체 환자군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다. 이에대해 연구진은 "전구 단계 관리의 사각지대가 여전히 존재함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연구진 "고위험군 중심 선별과 선제적 추적 관리가 현실적인 해법"
연구진은 이같은 생존 차이가 단순한 진단 시점의 문제가 아니라, 전구 단계에서 이뤄진 위험도 평가, 정기 검사, 합병증 예방 교육, 신체 상태 관리 등 누적된 관리 경험에서 비롯됐다고 밝혔다. 전구질환을 알고 있는 환자는 신체 상태가 비교적 안정적인 시기부터 의료진과 함께 질환 경과를 이해하고 대비할 수 있어, 실제 암으로 진행했을 때도 치료를 보다 안전하게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연구팀은 이번 결과를 근거로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선별검사를 확대해야 한다는 해석은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MGUS와 무증상 다발골수종은 진행 속도가 느리고, 모두가 암으로 발전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증상이 없는 사람에게 무분별한 검사를 시행할 경우 오히려 불안과 의료 부담을 키울 수 있다는 것이다.
대신 연구진은 고위험군 중심의 선별과 선제적 추적 관리 전략이 가장 현실적인 해법이라고 밝혔다. 연령, 동반 질환, 과거 검사 결과 등을 종합해 다발골수종 진행 위험이 높은 환자를 선별하고, 이들에게 정밀한 추적 관찰과 예방적 관리를 제공하는 방식이다. 연구팀은 앞선 연구에서 당뇨병, 심혈관질환 등 동반 질환에 따라 MGUS의 진행 위험이 달라질 수 있다는 위험도 예측 모델도 제시한 바 있다.
민창기 교수는 "이번 연구는 '전구 상태를 미리 아는 것이 실제로 의미가 있는가'라는 오랜 논쟁에 전국 단위 환자 데이터를 통해 답을 제시한 결과"라며 "전구 단계부터 체계적으로 추적 관찰을 받은 환자들이 그렇지 않은 환자보다 실제로 더 오래 생존한다는 점을 처음으로 입증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고 말했다.
이번 연구 결과는 국제학술지 '혈액암 학회지'(Blood Cancer Journal) 최신 호에 게재됐다.
rnkim@news1.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