얄타 회담에 모인 연합국 3거두. 왼ㅉ뽁부터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 프랭클린 미국 대통령,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 서기장 (출처: Photograph from the Army Signal Corps Collection in the U.S. National Archives.,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1945년 2월 4일, 크림반도의 휴양지 얄타에서 제2차 세계대전의 승기를 잡은 연합국의 세 거두가 모였다.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영국의 윈스턴 처칠 총리, 그리고 소비에트 연방의 이오시프 스탈린 서기장은 나치 독일의 최종 패배를 앞두고 전후 처리 문제와 새로운 세계 질서를 논의하기 위해 머리를 맞댔다.
회담의 가장 시급한 의제는 독일의 항복 조건과 점령 방식이었다. 삼국 정상은 독일을 동부, 서북부, 남서부로 나누어 분할 점령하기로 합의했다. 특히 프랑스의 공로를 인정해 별도의 점령 구역을 할당하기로 했다. 이는 독일의 재무장을 원천 봉쇄하고 군국주의의 뿌리를 뽑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또한, 나치 전범들을 처벌하기 위한 국제 재판소 설립과 독일의 전쟁 배상금 지불 문제도 구체적으로 다루어졌다.
폴란드 문제는 회담에서 가장 치열한 논쟁거리였다. 스탈린은 소련의 안전 보장을 위해 폴란드의 국경선을 서쪽으로 밀어내고 친소 정부를 세우기를 원했다. 논의 끝에 폴란드 동부 국경은 이른바 '커즌 라인'을 기준으로 정해졌으며, 부족한 영토는 독일의 동부 지역을 할양받는 것으로 타협했다.
태평양 전쟁의 조기 종결을 원했던 미국은 소련의 참전을 간곡히 요청했다. 스탈린은 독일 항복 후 3개월 이내에 일본과의 전쟁에 뛰어들겠다고 약속했다. 그 대가로 소련은 사할린 남부와 쿠릴 열도에 대한 권리를 보장받았다. 더불어, 국제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유엔(UN) 창설 방안과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의 거부권 행사 방식에 대해서도 최종 합의를 보았다.
얄타 회담은 연합국 간의 공조를 확인하고 전쟁 종결을 앞당기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그러나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에 따른 비밀 협약과 영토 조정은 훗날 냉전 체제의 씨앗이 되었다는 비판을 피하기는 어렵다.
acenes@news1.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