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배우 주아
"어휴, 덜덜 떨었죠. 스페인어로 첫 대사를 해야 했으니까요. 그래도 무대에 서면 부담감보다는 설렘이 더 커요. 심장이 콩닥콩닥, 기분 좋은 설렘이죠." 뮤지컬 배우 주아(51·본명 김은영)는 지난해 12월 초 GS아트센터에서 개막해 순항 중인 공연 '라이프 오브 파이'에서 1인 3역으로 무대에 오르고 있다. 그가 맡은 역할은 엄마·간호사·오랑우탄이다.
30여 년 경력의 배우지만, 한국 초연 작품에 첫 대사로 공연의 포문을 여는 건 부담되는 일. 개막일, 커튼이 열리고 1200여 명의 관객 시선이 쏟아진 가운데 그가 내뱉은 첫 대사는 "부에노스 디아스, 파이"(안녕하세요, 파이)였다.
주아는 1994년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로 데뷔한 이후 '토요일밤의 열기' '마리 앙투아네트' '모차르트!' 등 30여 편의 작품에 출연하며 탄탄한 이력을 쌓아 왔다. "무대는 숨구멍"이요, "계속 성장해 80세까지 무대에 서고 싶다"는 이 열혈 배우를 최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라이프 오브 파이' 출연 계기는.
▶오디션을 봤다.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를 봤는데 내용이 굉장히 철학적이어서, 이 작품에 꼭 한번 참여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영화 속 엄마 역할은 작았지만, '역할의 크기가 뭐가 중요한가?' 싶었다.
-1인 3역을 소화하고 있는데, 어려운 점은.
▶스페인어와 퍼펫티어(인형사)는 모두 처음이라 도전이었다.오랑우탄 퍼펫은 세 명의 배우가 함께 움직이는데, 나는 다리를 맡고 다른 두 배우가 각각 머리와 팔을 담당했다. 퍼펫 연기는 배우들 간 협업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한 사람의 개성이 튀면 안 되기 때문에 연습 과정에서도 서로 맞춰가는 데 많은 공을 들였다.
'라이프 오브 파이'에 출연 중인 주아(오른쪽)와 박정민.
-'파이' 역의 박정민·박강현 배우는 어떤가.
▶정민이는 상대 배우가 저절로 대사를 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정민이가 주는 에너지가 워낙 많아서 상대가 자연스럽게 반응하게 된다. 본능적으로 자동 반사하듯 대사가 튀어나오게 만드는 능력을 갖고 있다. 정말 훌륭한 배우다.
강현이는 뮤지컬 배우만이 지닌 정서가 있다. 작곡가와 작가가 음악 속에 담아 놓은 함축적인 의미를 전하는 작업이 몸에 배어 있다. 그래서 연출이나 작가가 의도한 메시지를 대사로 풍성하게 표현한다. 강현이가 하는 대사가 깊이 와닿는 이유다.
-'라이프 오브 파이'는 어떤 작품으로 기억에 남을까.
▶이 작품은 배우들 서로의 숨, 땀, 살냄새까지 부대끼며 만들어 가는 공연이다. 물론 다른 작품들도 협업하지만, 이렇게까지 끈끈하고 진한 경험은 흔치 않다. '서로의 냄새와 향기'를 잊지 못하는 작품으로 남을 것 같다.(웃음)
'라이프 오브 파이' 주아 배우 공연 스틸(에스앤코 제공)
"인생작은 '지크수'…최정원 선배에게 큰 영향 받아"
-연기는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아버지가 서라벌예대 연극과를 나오셨고, 잠깐이지만 영화배우로 활동하셨다. 영화에 출연하면서 찍은 사진이 집에 있었던 기억도 난다. 나는 교회 행사에서 연극을 하면서 무대를 접했고, 계원예고와 서울예대 연극과에 들어갔다. '꼭 배우가 돼야지'라고 결심을 했다기보다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 길로 오게 된 것 같다.
-1994년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지크수')로 데뷔했다.
▶스무 살이었고, 앙상블로 데뷔했다. 당시 예수 역은 조하문, 마리아는 윤복희 선생님이 맡으셨다.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했는데, 나는 늘 공연장에 일찍 가 텅 빈 무대에서 윤복희 선생님의 표정과 동선을 하나하나 따라 하며 마리아를 연습했다. 주변 배우들에게도 "나는 언젠가 마리아를 할 거야, 죽기 전에 꼭 할 거야"라고 말하고 다녔다.
간절히 바라면 이뤄지는 법이다. 12년 뒤 주아는 '지크수' 공연에서 마리아 역으로 무대에 올랐다. 제작사에 직접 전화를 걸어 오디션 기회를 달라고 "당돌하게 요청"했고, 그 당돌함은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해 그는 꿈에 그리던 역을 쟁취해 냈다. "'지크수'는 내 데뷔작이자 인생작"이라고 했다.
-꿈의 역을 따낸 2006년 '지크수' 첫 무대는 어땠나.
▶지금까지 한 모든 작품 중에서 가장 못 한 공연이었다. 잘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 컸던 것 같다. 그 경험을 통해 배우는 욕심이 과하면 안 된다는 걸 뼈저리게 배웠다. 다행히 마지막 공연 때는 칭찬도 많이 받고 나 자신도 뿌듯했다. 그때부터 공연을 녹음하는 습관이 생겼다. 녹음본을 들으면 내 실력이 그대로 드러나 마치 발가벗겨진 느낌이다. 그래도 계속 모니터링하며 수정하고 보완할 점을 찾는다.
-배우로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선배가 있다면.
▶최정원 선배다. '나도 선배처럼 오래 무대에 설 수 있겠구나'라는 희망을 주는 존재다. 예전에는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면 배우로서 활동이 끝난다는 인식이 있었는데, 그 틀을 깨준 분이다. 정원 선배는 무엇보다 자기 관리가 철저하고, 무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다. 최고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노력을 멈추지 않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큰 영향을 받았다.
뮤지컬 '마리 앙투아네트'에서 주아 배우의 공연 모습.
"인성 바뀌면 노래도 바뀐다…배우, 죽을 때까지 노력해야"
-홍대 공연예술대학원 겸임교수(2015~2022)로 강단에도 섰다. 학생들에게 가장 강조한 점은.
▶인성이다. 인성이 바뀌면 노래가 바뀐다. 태도가 갖춰지지 않으면, 아무리 노래를 가르쳐도 안 되더라. 반대로 인성이 바뀌면 노래도 달라진다. 이건 변함없는 진리다.
-최근 인상 깊게 본 작품은.
▶'몽유도원'이다. 완성도 높은 창작극이더라. 특히 정가(正歌)가 인상적이었다. 공연을 보면서 '판소리와 정가를 배울 생각을 왜 안 했지? 내가 너무 안주하고 있었구나' 반성하게 됐다. 그래서 요즘 정가와 판소리를 공부하고 있다. K-컬처가 큰 인기인데, 우리 뮤지컬 배우들도 '우리 것'을 더 깊이 공부해야 하지 않나 싶다.
-성장에 대한 강한 열망이 느껴진다.
▶지금 내가 가진 것만으로는 아주 부족하다고 느낀다. 계속 배워야 80세까지 무대에 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가진 것을 '우려먹는' 시기는 지났다. 관객들 수준도 상당히 높고, 작품도 다양해지고 있다. 배우는 죽을 때까지 노력해야 한다. 언젠가 올 오디션을 늘 대비하는 것이 계획이다.(웃음)
jsy@news1.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