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다 노부나가는 멍청이가 아니다 [임용한의 역사 크루즈]

생활/문화

뉴스1,

2026년 2월 16일, 오전 09:00

임용한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

오와리의 멍청이
새가 시끄럽게 울면 오다 노부나가는 베어 버리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어르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울다 지칠 때까지 기다린다는 말이 있다. 세 사람의 개성을 적절하게 묘사한 비유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개성이 아니라 밖으로 드러난 행적, 겉모습만 보고 내린 비유다.

이런 말을 하면 의아하게 생각할 분이 많을 것이다. 오다 노부나가는 좋게 보면 화통하고, 결단이 빠르고, 미련이 없다. 그러다 보니 때때로 냉혹하고 잔혹해진다. 그가 히데요시와 이에야스와 다르게 부하의 반란으로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 데는 그의 이런 성격 탓도 있다.

노부나가가 이런 성격인 건 맞다. 그의 행적을 보면 정말로 그런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런 결단력과 신속함의 원인을 본인의 성격에서 찾는 해석이 틀렸다.

성격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노부나가의 행동이 성정, 기질 때문만이었다면 그의 성공을 설명할 수 없다. 전국시대에 반짝하다가 사라진 많은 도전자처럼 노부나가는 전국시대 패자의 영예를 얻기 오래전에 쓰러졌을 것이다.

청소년 시절에 노부나가 집안의 영지인 오와리(현 나고야 일대) 사람들은 노부나가를 오와리의 멍청이라고 불렀다. 노부나가 집안은 전통적인 다이묘 가문이 아니었다. 오와리에는 8개의 군이 있었는데, 먼저 군을 장악하고, 점차 성장해서 부친 노부히데 때에는 오와리 전체를 섭렵해 가고 있었다.

그의 맏아들이 노부나가였는데, 도저히 신분에 맞지 않는 이상하고 천박한 옷을 걸치고, 머리도 이상하게 묶고, 제멋대로 거리를 싸돌아 다녔다. 조선도 그렇고 일본은 지금도 그렇지만 사회적 지위, 예법에 맞는 복식과 행동을 중시한다. 노부나가는 이를 무시하고, 천박한 모습과 행동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거리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은 채, 밤이나 감은 말할 것도 없고 오이까지 씹어 먹었다. 거리에 선 채 떡을 먹고, 남에게 몸을 기댔고, 늘 남의 어깨에 매달려 걸었다. 사람들은 노부나가를 천하의 멍청이라고 밖에 부르지 않았다.
노부나가의 부하가 쓴 '신장공기'에 있는 서술이다. 이 문장만 보면 난봉꾼 생활을 한 것 같다. 그런데 '신장공기'도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이 '멍청이'란 단어만 보고 제멋대로 상상했는데, 십대 시절의 노부나가는 아버지는 위험한 전장을 뛰어다니며 세력 확장, 생존 투쟁에 몰입하고 있는데 맏아들이란 자가 아버지를 도울 생각은 하지 않고 유흥에 빠지고 놀기만 하는 진짜 멍청이는 아니었다.

'신장공기'의 서술을 보자.

노부나가는 특별히 놀이에 빠지지 않았으며 밤낮으로 마술을 연마했고, 수영도 열심히 해서 매우 잘했다. 그 무렵 죽창으로 시합하는 모습을 보고, 창을 5m에서 6.4m까지 늘이도록 했다.
그는 자신이 직접 스승을 골라 궁술, 화승총, 병법을 열심히 공부했다. 매사냥도 열심히 했는데 이것도 유흥 목적이 아니었다. 사냥감을 찾듯이 적을 먼저 발견하고, 먼저 조치하고 대응하는 훈련이었다.

노부나가의 시대는 변화의 시대였다. 과거의 전통, 신분, 체제가 바뀌고 새로운 시대를 요구하고 있었다. 또한 전에 없던 다이묘 간의 통일전쟁이 곧 시작될 터였다. 그가 복장과 행동에서 격식을 무시했던 것은 새로운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과거의 관습에서 벗어나야 했기 때문이다.

삼국시대에 조조가 연주를 장악했을 때, 다른 사람들은 바보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연주는 원소, 원술, 손견, 도겸, 유표 등 쟁쟁한 제후들의 영지 한복판에 있었다. 조조 스스로 자신은 1대 6으로 싸워야 한다고 자인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조조는 대책이 있었다. 기동력이다. 남보다 빨리 움직이며 적을 각개격파 한다. 프리드리히도 나폴레옹도 같은 방식으로 10배의 적과 대등하게 싸웠다. 노부나가가 기괴하지만 간편한 복장을 하고, 길에서 떡을 먹고 오이를 씹어 먹는 행동을 하면 전통적인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리더로서 인정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몰라서 멍청해서 했던 것일까. 아니면 그런 진짜 바보들을 제압할 사고와 행동방법을 연구하고 실험하고 있었던 것일까. 답은 당연히 후자다. 노부나가가 멍청이가 아니라 그를 멍청이라고 했던 사람들이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들이었다. 노부나가가 행동이 빠르고 다른 사람이 생각지 못한 선수를 쳤던 이유도 성격이 담박하고 급해서가 아니라 그의 생각과 통찰이 앞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요스 성의 비밀
부친 노부히데는 1552년 오와리의 통일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42세에 전염병에 의한 급사였다. 노부나가는 18세, 오다 가문과 부하들은 순식간에 배신하고 분열했다. 노부나가는 이들과 전투를 벌이면서 아슬아슬하게 생존 투쟁을 계속했다. 부인과는 사이가 좋았지만, 북쪽 미노를 차지하고 있는 장인 사이토 도산조차도 믿을 수가 없었다. 오와리든 미노이든 전국투쟁에서 살아남으려면 두 지방은 병합돼야 했다. 남동쪽에서는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세력이 호시탐탐 오와리를 노리고 있었다.

1555년에 유일한 조력자이던 숙부 노부미츠가 주성인 나고야성 북서쪽 8㎞ 지점에 있는 기요스성을 빼앗았다. 노부나가는 주저 없이 노부미츠에게 나고야를 주고 자신이 기요스로 이전했다.

기요스성. 원래 모습은 아니고 원위치 건너편에 복원한 모습이다. (필자 제공)

지난달에 기요스성을 답사했다. 과거에 읽었던 노부나가에 대한 서술 중에서 기요스성 이전은 그리 중요하게 거론되지 않아서 굳이 방문할지 고민했었다. 막상 현장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기요스는 나고야의 한강이라고 할 수 있는 쇼나이강의 지류인 신 강변에 있다. 강변에 바짝 붙어 있는 평지성으로 신 강이 해자 역할을 해 주기는 하지만, 방어력이 특별히 뛰어난 성은 아니다.

기요스로 이전한 이유는 한 가지밖에 없다. 당시 상업은 물류 수송이 제일 과제였고, 물류에는 하천이 오늘날의 고속도로 역할을 했다. 강병을 위해서는 부국이 필요하다. 당시에 많은 영주들이 하천을 끼고 주성을 쌓고 강변에 시장과 창고를 조성하는 것이 유행한다. 이런 행동을 노부나가만 한 건 아니었지만, 노부나가는 이런 부분에서 선구적이었고, 무엇보다도 용감했다.

보통의 리더였다면 수 킬로미터 밖에 반역자와 배신자가 웅거하고 있는 상황에서 어떡해서든 안전한 요새를 거성으로 삼으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노부나가는 달랐다. "숨어서 눈치를 보느니 목숨을 걸고 도전한다"가 노부나가의 신조이자 용기였다.

성급하고 단순해 보이는 이미지와 반대로 노부나가는 통일 일본에 가장 중요한 것이 국가의 혈맥, 자유롭고 효율적이며 생산적인 경제체제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패자로 군림한 후에 노부나가는 번마다 받던 관세를 폐지하고, 전국적인 시장과 전국 시장을 무대로 하는 새로운 시장질서와 상인집단을 창출했다. 근대적인 자유상업은 아니지만, 번으로 쪼개져 있던 이전에 비하면 혁신적인 변화였다.

강력한 군대를 만들기 위해서도 부가 필요했다. 오와리가 아무리 곡창지대라고 해도 농사 수익만으로는 비싼 조총부대를 편성하기도 힘들었다. 당시 동아시아에서는 중국의 동전을 수입해서 자국 통화로 사용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노부나가는 명나라 동전인 영락통보 3개를 문장처럼 새긴 깃발을 자신의 표식으로 삼았다. 상인들에게 그 이상 확고한 메시지는 없었다.

오늘날 일본사 연구자들도 오다 노부나가의 개방적 경제정책, 무역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는 높게 평가한다. 노부나가가 살해되지 않고 계속 일본을 지배했더라면 도쿠가와 가문의 쇄국정책은 없고 일본이 더 빨리 발전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던지는 사람도 있다. 솔직히 그건 좀 심한 상상이라고 생각하지만, 노부나가가 자신의 후계자들보다 훨씬 진보적인 경제정책을 추진했던 것은 사실이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노부나가는 절대로 성급하고 충동적이며 화통하기만 한 사람이 아니었다. 의외로 놀랍도록 치밀하고 분석과 통찰력을 지닌, 미래를 먼저 보고 달려간다는 부분에서 화통하고 직관적인 인물이었다. 멍청이 소리를 들은 그의 행동과 복장, 지나치게 성급해 보이는 전략과 전투는 행동이 생각을 앞서서가 아니라 그의 생각이 동시대인의 생각과 행동을 한참 앞섰던 결과였다.

기요스로 이전하고 상업을 진흥하고, 상인들의 인망을 얻는 것이 부를 축적하는 수단만은 아니었다. 오다 노부나가를 유명하게 만든,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던 오와리의 멍청이가 한순간에 전국의 주목을 받고, 천하 패권에 도전하게 만든 사건 오케하자마 전투의 승리에도 기요스 이전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다음 이야기는 다음 편 '노부나가와 오케하자마의 승리'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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