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옥 연출. (사진=연합뉴스)
광주에서 태어난 고인은 광주서중(6년제)을 졸업한 뒤 중앙대 국문과에 입학했고, 서울대 불문과로 옮겨 졸업했다. 프랑스 소르본대에서 불문학과 영문학을 공부했다. 유학 시절 프랑스에 온 극작가 유치진(1905~1974)의 영향으로 연극으로 진로를 바꿨고, 1959년 귀국해 중앙대 연극영화학과 전임강사가 되면서 본격적으로 연극인의 길을 걸었다.
1961년 이화여대 연극반 학생들과 연극 ‘리시스트라다’를 통해 연극 연출을 시작했다. 1962년 드라마센터 개관 공연 ‘햄릿’ 조연출을 거쳐 1963년 민중극장 창단과 함께 본격적인 연출가의 길로 나섰다. 창립 공연은 ‘달걀’, 두 번째 작품은 부조리극 ‘대머리 여가수’였다. 박근형, 오현주, 김혜자, 추송웅, 박정자, 김무생, 권성덕, 김정, 구문회 등이 출연했다.
1977년 ‘대머리 여가수’의 원작자인 외젠 이오네스코(1909~1994)가 방한해 연극을 관람한 뒤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1961년 KBS 공채 탤런트로 데뷔했던 배우 김혜자는 배우 활동을 중단했다가 고인의 연출작 ‘달걀’과 ‘도적들의 무도회’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무대미술가 이병복(1927~2017)과 함께 1966년 극단 자유를 창립한 뒤 ‘따라지의 향연’(1966) 등으로 한국을 대표하는 연출가로 주목을 받았다. 박정자 등 당대 최고의 배우들과 함께 사실주의와 서구 중심의 시각을 뒤집는 ‘제3의 연극’을 추구했다. 1969년 이병복이 서울 충무로에 세운 ‘카페 테아트르’를 통해 소극장 운동을 시작, 살롱 드라마와 몰리에르 희극, 부조리극 계열의 번역극을 연출하면서 사실주의극 무대를 변혁하는 실험을 추구했다.
‘무엇이 될고하니’(1978)부터 한국의 전통연희와 굿 형식을 연극에 수용하기 시작했다. ‘피의 결혼’(1984), ‘바람은 불어도 꽃은 피네’(1984) 등을 통해 연극을 ‘서양적인 것에서 동양적인 것으로’, ‘이국적인 것에서 한국적인 것으로’ 만들어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1980년대부터는 극단 자유를 이끌고 프랑스·스페인·일본·튀니지 등 10여 개국 수십 개 도시에서 한국 전통 정서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을 선보여 국제적 호평을 받았다.
1991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됐다. 1995년 6월 아시아인으로는 처음으로 유네스코 국제극예술협회(ITI) 회장이 된 뒤 3연임했고 명예회장으로 추대됐다. 한국문화예술진흥원장(2000), 대한민국예술원 회장(2011)을 역임했다. 2004년 얼굴박물관을 개관했다. 2002년 한국인 최초로 프랑스 최고 등급 문화예술 공로 훈장인 코망되르를 받았다.
유족은 부인 조경자씨와 딸 김승미 서울예대 교수, 아들 김승균 얼굴박물관 이사, 사위 홍승일 전 중앙일보디자인 대표 등이 있다. 빈소는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 14호실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20일 오전 7시 30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