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만 부처가 굽어보는 능선 따라가니…'엄지 척' 반기는구나

생활/문화

이데일리,

2026년 2월 20일, 오전 06:08

[장흥(전남) 글·사진=이데일리 강경록 여행전문기자] 전남 장흥의 지평선에 들어서면 나그네의 시선을 먼저 낚아채는 것은 탐진강의 유려한 물줄기도, 드넓은 장흥 들녘도 아니다. 마을 뒤편에 병풍처럼 둘러쳐진 장엄한 바위산, 바로 ‘억불산’(해발 518m)이다.

이름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억(億) 개의 불상이 서 있는 산’이라니. 불교적 수치로 무한에 가까운 그 숫자가 산의 함자가 된 것은 단순히 바위가 많아서만은 아닐 터다. 그것은 고단한 삶을 이어가는 중생들을 굽어살피는 자비의 시선이 그만큼 촘촘하기를 바랐던 민초들의 절박한 염원이었을지도 모른다.

겨울의 억불산은 그 어느 계절보다 투명한 민낯을 드러낸다. 덕분에 산을 이루는 기암괴석들은 저마다의 굴곡을 뚜렷하게 뽐낸다. 멀리서 보면 자비로운 부처의 형상이요, 가까이서 보면 고단한 역사를 견뎌낸 남도 사람들의 주름진 얼굴이다. 히말라야의 고봉에 비하면 매우 초라한 높이지만 장흥 들판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이들에게 이 산은 하늘과 맞닿은 가장 높은 경계이자 억겁의 세월을 버텨온 정신적 지주였다.

억불산 정상부 전경. 며느리바위와 암릉, 편백숲, 그리고 장흥 들판이 어우러진 풍광.
◇연민이라는 이름의 지고한 금기(禁忌)

억불산의 중심점은 ‘며느리바위’다. 산 중턱에 홀로 우뚝 솟은 이 기암에는 전설이 서려 있다. 인색하기 짝이 없는 시아버지가 스님에게 오물을 뿌리는 패륜을 저지르고 이를 몰래 사과하며 시주한 며느리가 재앙을 피해 산으로 피신했다. “절대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금기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이후 천둥소리와 함께 들려온 시아버지의 처절한 비명. 며느리는 자신의 안위보다 자신을 구박했던 그 노인의 마지막 외침에 몸을 돌렸다. 그 순간 며느리는 등에 업힌 아이와 함께 그대로 돌이 됐다. 신화적 관점에서는 불순종의 상징이겠으나, 인문학적 시각에서 이는 인간이 인간에게 가질 수 있는 가장 숭고한 감정인 연민의 결정체다.

실루엣으로 떠오른 억불산 능선과 며느리바위. 해오름 이후 빛이 돌기둥을 감싼다.
이 전설은 장흥이 낳은 거장 ‘이청준’의 문학과도 맥을 같이한다. 그의 소설 『축제』나 『눈길』에서 보여주듯 남도의 한(恨)은 누군가를 원망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타인을 향한 지극한 ‘용서’와 ‘화해’로 승화된다. 뒤를 돌아본 며느리의 선택 역시 자신을 괴롭힌 시아버지를 끝내 저버리지 못한 인간적 애처로움의 발로였을 것이다. 스스로 고난을 짊어짐으로써 비극을 완성한 이 바위 여인은, 수백 년째 탐진강이 득량만으로 흘러드는 길목을 묵묵히 굽어보고 있다.

그래서일까. 겨울바람 속에 홀로 선 며느리바위를 바라보면 아이를 꼭 업고 뒤를 돌아보는 여인의 실루엣이 가슴을 친다. 뒤를 돌아본다는 것은 과거를 회상하는 것이며, 타인의 고통에 반응하는 행위. 효율과 속도만이 숭상받는 이 시대에 우리는 과연 뒤처진 이들의 비명에 단 한 번이라도 고개를 돌린 적이 있는지를 억불산의 며느리바위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겨울빛에 잠긴 득량만과 장흥 들판. 바다와 평야, 산이 한 폭의 수묵화처럼 겹친다.
◇말레길 따라 비움과 치유의 숲을 걷다

억불산은 거친 암봉의 외형을 가졌지만 그 품으로 들어가는 과정은 한없이 다정하다. 산행의 들머리는 정남진 천문과학관 주차장이다. 여기서부터 정상 턱밑까지는 ‘말레길’이라 불리는 덱길이 이어진다. ‘말레’는 대청마루를 뜻하는 전라도 방언이다. 이름처럼 평탄하고 넓은 이 길은 산이 인간에게 내어주는 가장 안온한 대청마루다.

길 양옆으로는 수십 년 된 편백나무 숲이 장관을 이룬다. 억불산 편백숲은 ‘치유의 숲’이다. 겨울의 편백은 여름처럼 진한 향을 사방으로 흩뿌리지 않는다. 대신 나무의 내면으로 향기를 갈무리하고 그 곁을 지나는 이들에게만 은밀하고 차가운 청량감을 선사한다. 영하의 기온 속에서도 편백은 푸른 기운을 잃지 않는다. 그 시린 푸름 사이를 걷다 보면 일상의 번잡함은 서서히 휘발되고 마음엔 고요가 들어앉는다.

억불산 정상에서 내려다본 득량만의 해오름. 붉은 빛이 남해 다도해의 능선을 타고 번진다.
덱길을 걷는 것은 산을 정복하는 투쟁이 아니라 산과 대화하는 산책이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정상을 향해 돌진하는 대신, 나무의 결과 바위의 이끼를 관찰하며 느릿하게 걷는 시간. 억불산은 이 길을 통해 산행의 목적이 ‘도달’이 아닌 ‘과정’에 있음을 넌지시 일깨운다.

정상 부근에 도달하면 시야는 폭발하듯 터진다. 남해의 ‘득량만’이 한눈에 들어오고 그 너머로 점점이 박힌 다도해의 섬들이 수묵화의 필치처럼 펼쳐진다. 득량(得糧)이란 이름에는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군사들의 식량을 얻었다는 고단한 역사가 깃들어 있다. 그 은빛 바다는 오늘도 변함없이 잔잔한 물결로 남도의 땅을 적신다.

겨울빛에 잠긴 득량만과 장흥 들판. 바다와 평야, 산이 한 폭의 수묵화처럼 겹친다.


발 아래로는 장흥 읍내를 관통하는 ‘탐진강’의 물줄기가 굽이친다. 강은 들판을 적시고 바다로 향한다. 억불산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장흥의 들판은 계절의 순환을 오롯이 담고 있다. 가을의 황금빛은 사라졌으나 겨울의 마른 논밭은 다음 봄을 준비하는 인내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산 위에서 바라보는 인간의 마을은 지극히 평화롭다. 지상의 소란함은 산의 높이에 가로막혀서 들리지 않고 오직 청량한 바람 소리만이 귓가를 스친다.

억불산의 정점은 ‘해오름’이다. 득량만의 어둠이 서서히 걷히고 수평선 끝이 붉게 물들기 시작하면 산 아래의 모든 생명은 숨을 죽인다. 해가 솟구치는 순간, 며느리바위의 실루엣은 장엄한 후광을 얻는다. 그것은 돌이 된 여인이 다시 생명을 얻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강렬하다. 붉은 햇살이 장흥 들판을 가로질러 탐진강 물결 위로 쏟아질 때 그토록 찾아 헤맨 부처는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 장엄한 풍경을 마주하며 마음속에 일어나는 고요한 평화, 바로 그것이 부처라는 것을…

숯불 위에서 지글지글 익어가는 장흥 겨울 굴구이. 장갑을 끼고 껍질을 까는 손끝에서 바다의 계절이 열린다.
◇여행 수첩

▶가는 길: 자동차 이용 시 서해안고속도로나 남해고속도로를 거쳐 장흥 IC로 진입한다. ‘정남진 천문과학관’을 목적지로 설정하면 산행 들머리까지 쉽게 닿을 수 있다.

▶산행 코스: 천문과학관 주차장 → 말레길(덱길) → 며느리바위 전망대 → 억불산 정상. 왕복 1시간 30분~2시간이면 넉넉하며, 경사가 완만해 가족 단위 여행객에게도 제격이다.

▶먹을거리: 겨울 장흥의 별미는 단연 ‘굴구이’다. 남도 바다의 자연산 굴은 알이 굵고 맛이 진하다. 장갑을 끼고 뜨거운 굴 껍질을 까먹는 재미는 겨울 여행자의 특권이다. 여기에 장흥삼합(한우·키조개 관자·표고버섯)을 곁들이면 남도 미식의 절정을 맛볼 수 있다. 새콤한 바지락 회무침과 부드러운 매생이국 또한 놓칠 수 없는 즐거움이다.

갓 건져 올린 매생이국 한 숟가락. 바다 향이 진하게 배어 있는 겨울 장흥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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