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 대화재, 흰돌고래, 인형공장 여공들…역사와 설화에서 출발한 환상소설

생활/문화

뉴스1,

2026년 3월 24일, 오전 09:41

[신간] '우리 안에 불꽃이 있어'

장아미가 한국의 역사와 설화를 바탕으로 독자적인 환상의 세계를 담아낸 단편소설집 '우리 안에 불꽃이 있어'를 내놨다.

총 12편이 실린 소설집에는 한양 대화재부터 처용 설화, 일제강점기 인체 실험, 인형 공장의 소녀 직공들까지 고대와 현대를 오가며 강자의 수탈과 약자들의 저항을 우화로 밀어붙인다.

수록작 '꽃불'은 한양을 뒤덮는 화마와 맞선 결단을 전면에 둔다. 못생겼다는 이유로 천대받던 고아 희의 몸속에서 불의 신성이 발아하고, 왕이 궐을 비운 틈에 만삭의 왕후가 불을 잠재워야 하는 상황이 펼쳐진다. 생명을 사르는 불과 새 생명을 품는 물의 대립이 서사를 밀어 올린다.

'붉은 돛'은 작은 어촌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우연히 잡힌 흰돌고래가 주상에게 진상되며, 어촌은 원치 않았던 이무기의 분노를 깨운다. 이무기를 잡으러 간 무사와 그를 기다리는 처녀의 일화를 담은 '백일홍 설화'를 다시 빚어, 권력이 백성의 희생을 강요하는 방식을 겨눈다.

'푸른 신명'은 역병이 도는 국가적 위기 속에서도 세금 수탈을 멈추지 않는 탐관오리를 피해 떠난 유민들의 이야기를 건다. 인적미답의 땅을 찾았다는 기대는 살아 있는 듯한 숲의 위협으로 뒤집힌다. 위기마저 수탈의 도구로 삼는 폭력의 얼굴을 환상으로 드러낸다.

'빨간 제비부리댕기'는 희생양 서사를 뒤집는다. 호랑이의 제물로 바쳐진 소녀 이화가 산군의 아들과 금기된 사랑을 나누며, 자신 안에 숨겨져 있던 야성적 능력을 개화한다. 전래 동화의 구조를 전복해 주체적인 여성의 탄생을 강렬하게 밀어붙인다.

'도련님과 아가씨와 나'는 경성 변두리의 작은 호텔 '다정'을 무대로 삼는다. 부엌어멈과 순박한 처녀 석남, 지배인 희태가 꾸려 가는 일상에, 낮에는 외출하지 않는 주인 부용과 멀리 미국에 있던 연인 백민이 겹쳐 들어오며 균열이 시작된다. 익숙한 생활의 틈에서 불길한 변주가 번진다.

'인형들'은 자본주의적 착취의 현장을 공포로 바꾼다. 밤이 되면 빼앗긴 소녀들의 영혼으로 만든 인형들이 공장에서 대신 일한다는 소문이 돈다. 소문을 좇아 밤의 공장에 들어간 주인공은 악몽 같은 착취의 현장에 갇히며, 약자들의 반란이 무엇을 깨뜨리는지 끝까지 묻는다.

작가는 한국적 사건과 설화의 틈새를 파고들었다. 환상을 장식으로 두지 않고, 권력과 착취가 만들어낸 부조리를 비추는 거울로 삼았다.

△ 우리 안에 불꽃이 있어/ 장아미 지음/ 황금가지/ 1만8000원

art@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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