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恨, 억겁의 결…노을빛 '시간여행'에 물들다 [여행]

생활/문화

이데일리,

2026년 3월 27일, 오전 06:00

변산반도의 인기 관광지 채석강과 서해 일몰이 어우러진 풍경 (사진=한국관광공사)
[부안(전북)=글·사진 이데일리 김명상 기자] “내 고향은 가난해서 보여줄 게 노을밖에 없네.” 이준익 감독의 영화 ‘변산’에서 주인공 학수가 읊조리던 시의 일부다. 영화와 달리 변산반도에선 볼거리가 바다에서 내륙 구석까지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또 다른 매력은 시간이다. 나이가 7000만 년에 달하는 지층이 절벽으로 서 있고, 천 년의 고찰이 고목과 함께 늙어가는 곳. 그 모든 것을 처음부터 지켜봤을 붉은 낙조는 오늘도 바다를 수놓으며 방문객에게 긴 이야기를 전한다.

삼면이 바다를 접하는 변산반도 여행이라고 하면 으레 자연 풍경을 떠올리기 쉽지만, 역사적인 사찰도 빼놓을 수 없다. 이번 여정은 634년에 창건한 천년 고찰 ‘개암사’에서 출발했다.

‘용머리 법당’으로 불릴 만큼 용머리 장식이 천장에 가득한 개암사의 대웅보전
백제 무왕 때 지은 사찰로 경내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대웅보전’이 눈에 들어온다. 처마 왼쪽에는 청룡이, 오른쪽에는 백호가 새겨져 있는 좌청룡 우백호의 구조다. 풍수지리의 사신(四神) 구도를 건축에 직접 담아낸 독특한 사례다. 대웅보전 내부 천장은 용 조각으로 빼곡해 ’용머리 법당‘이라는 별명이 붙은 곳이다.

개암사 대웅보전과 뒤편에 자리한 우금암
개암사 뒤편에 보이는 큰 바위는 ‘우금암’이다. 마치 사찰을 호위하는 무사처럼 듬직하면서 묵직하다. 안내하던 국립공원공단 관계자의 말이 귓전을 울렸다. “저 바위의 모습이 마치 열려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나요? 그래서 ‘열 개(開)’, ‘바위 암(巖)’자를 써서 개암사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설도 있죠.”

대웅보전 뒤로 난 길을 따라 30분 정도 올라가면 우금암 근처에 닿는다. 이곳에는 백제의 아픔이 오롯이 배어 있다. 660년,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 멸망한 뒤 백제 부흥 운동을 일으킨 복신 장군이 마지막까지 숨었던 굴이 우금암 아래에 있는 ‘복신굴’이라고 전해진다. 옆에는 ‘원효방’이라는 또 다른 굴이 있다. 신라는 백제 유민들의 상심을 치유하기 위해 의상대사와 원효대사를 보냈고, 원효대사는 복신굴 옆에 굴을 짓고 수도를 했다는 이야기가 내려온다. 나라를 잃은 자들의 슬픔과 그 슬픔을 어루만지려 했던 손길이 아직도 이 굴 앞에 교차하는 듯하다.

개암사 뒤편의 우금암 아래에 있는 ‘복신굴’
매년 4월 초부터 중순까지는 개암저수지를 끼고 개암사 입구에 걸친 약 2㎞의 길이 벚꽃으로 뒤덮인다. 길 양쪽으로 벚꽃이 터널을 이루는 모습은 변산반도에서도 손꼽히는 봄 절경이다. 올해는 4월 3~5일에 개암동 벚꽃축제가 열린다. 축제 기간엔 차량을 전면 통제하기 때문에, 꽃 터널 아래를 두 발로 걸을 수 있다.

변산반도의 또 다른 명찰은 ‘내소사’다. 개암사보다 1년 먼저 창건된 역사를 자랑하는 내소사의 주인은 나무다. 내소사 일주문에서 천왕문까지 600m 길 양옆으로 수령 100년이 넘는 전나무 700여 그루가 도열해 있다. 경내에 들어가면 수령이 1000년에 달한다는 ‘할머니 당산나무’가 있다.

내소사 경내에 있는 수령이 1000년에 달한다는 ‘할머니 당산나무’
사찰의 주인공이기도 한 나무 주변에는 울타리가 쳐져 있는데 소원을 적은 방울이나 소원판이 빼곡히 걸려 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방울이 울리는데 마치 자연이 나무를 향해 제를 지내는 듯한 느낌도 든다.

내소사를 둘러싼 산 이름은 ‘능가산’이다. 능가(楞伽)는 범어를 옮긴 말로 ‘그곳에 도달하기 어렵고, 들어가기 어렵다”는 뜻이다. 부처님의 깨달음에 이르기가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소사의 대웅보전 현판. 조선시대 서예가 원교 이광사의 글씨다.
1633년에 지어진 내소사의 대웅보전은 단청이 모두 바래 나무 본연의 결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인위적인 색이 사라진 자리에 새겨진 것은 400년이라는 시간이다. 힘 있게 쓰인 현판 글씨는 추사 김정희가 보고선 “내가 졌다”며 인정했다는 조선 후기의 서예가 원교 이광사의 작품이다. 서예를 잘 몰라도 호방한 기운을 느낄 수 있는 명품 필체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지질의 시간, 절벽이 되다

유네스코 세계 지질공원으로 등재된 변산반도의 대표 명소 ‘채석강’은 이름 속에 작은 거짓말을 품고 있다. ‘강(江)’이라 하지만 이곳에 넘실대는 것은 강물이 아닌 바다다.

채석강 전경 (사진=한국관광공사)
시선(詩仙) 이태백이 술에 취해 강물에 비친 달을 건지려고 물에 뛰어들었다는 이야기가 깃든 중국의 채석강을 닮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가까이서 보니 경탄이 나왔다. 이태백이 쓴 수천 편의 시를 한 장 한 장 눌러서 절벽 형태로 제본한다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7000만 년 역사를 품은 채석강의 퇴적층 단면은 장구한 지구의 역사를 도려낸 듯하다.

적벽강의 주상절리
채석강에서 해안을 따라 조금만 더 가면 ‘적벽강’이 나온다. 중국 소동파가 즐겨 노닐던 적벽과 비슷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직접 보면 뜨거운 용암이 차가운 진흙을 만나 폭발하듯 뒤섞이며 생긴 페퍼라이트(peperite), 그리고 용암이 물에 닿아 급격히 식으면서 수축해 육각기둥으로 갈라진 주상절리가 있다. 채석강이 오랜 시간 쌓인 인내의 모습이라면, 적벽강은 순간이 굳은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봄을 기다리는 직소보로 향하는 길

내변산 깊숙한 곳, ‘직소폭포’로 향하는 길목엔 변산의 봄을 가장 먼저 알리는 ‘변산바람꽃’이 자생한다. 꽃길을 지나 10여 분 걸어가면 거울처럼 맑은 수면에 산세를 비추는 ‘직소보’가 나타난다. 에메랄드 빛깔의 물이 보를 채운 풍경은 어쩐지 노르웨이의 피오르 지형을 닮았다. 상수원 보호구역이라 노르웨이처럼 유람선이 뜨지 못하지만, 그에 못지않은 절경이라 할 만큼 눈이 즐겁다.

직소폭포로 가는 길에서 만날 수 있는 저수지 직소보
직소보는 수면에 화사한 꽃잎이 내려앉는 4월이 유명하다. 특히 직소보에서 직소폭포로 이어지는 ‘변산 봄꽃 코스’는 일부러 시간을 내어 찾아도 전혀 아깝지 않은 명소 중의 명소로 손꼽힌다.

영화 ‘변산’의 주인공 학수는 노을을 보며 고향이 가난하다고 했지만, 직접 가보니 물질적인 면을 뛰어넘는 아름다움이 있었다. 그래서일까. 영화 속 상대역인 선미(김고은 분)는 이렇게 말한다. “장엄하면서도 이쁘고, 이쁘면서도 슬프고, 슬프면서도 저리 고울 수도 있으면, 더 이상 슬픔이 아니겠다.”

추천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