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드 툴루즈-로트레크의 ‘세탁부’(1886). 프랑스 파리 몽마르트르의 세탁소에서 일한 실존인물 카르멘 고댕을 모델로 삼았다. 세탁부는 당시 파리에서 험한 직종이었지만 낮은 임금 탓에 상당수가 밤의 여인으로 살아야 했다. 카바레 주요 고객이던 툴루즈-로트레크는 술집에서 만난 고댕의 우수에 찬 눈빛에 반해 당장 모델로 삼았다고 전해진다. 이후 고댕은 매춘부 연작을 포함해 툴루즈-로트레크의 작품 13점에 등장했다. 2005년 미국 뉴욕 크리스티경매에서 2240만달러(당시 약 232억원)에 낙찰되며 툴루즈-로트레크 작품 중 최고가를 기록하기도 했다. 캔버스에 유채, 93×75㎝. 개인소장.
[이윤희 미술평론가] 1864년 11월 24일 프랑스 남부의 소도시 알비. 고색창연한 한 저택에서 갓난아이의 울음소리가 울렸다. 백작 집안의 대를 잇는 정통 귀족으로 태어난 사내아이는 앙리 드 툴루즈-로트레크(1864∼1901). 그의 가문은 8세기 카롤링거 왕조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만큼 유서가 깊었다. 만약 그가 아버지보다 오래 살았다면 당연히 툴루즈-로트레크 백작의 작위를 계승했을 것이다. 하지만 거센 운명은 중세의 명예로운 가문을 잇는 대신 파리 몽마르트르의 사창가로 그를 이끌었다.
문제는 근친혼이었다. 툴루즈-로트레크의 부모는 사촌지간이었고 두 할머니는 자매였다. 가문의 재산과 혈통을 보전하려던 귀족 사회의 오랜 관행이 그들의 자녀에게 치명적인 유전 질환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툴루즈-로트레크는 어린 시절부터 허약했고, 열세 살과 열네 살에 연이어 양쪽 대퇴골이 골절됐으나 정상적으로 아물지 않았고 제대로 붙지 않았다. 성인이 된 그의 몸 상반신은 평균이었으나 다리는 어린아이에 머물러 키가 152㎝를 넘지 못했다. 현대의학은 이 질환을 ‘툴루즈-로트레크 증후군’, 좀 더 전문적으로는 농축골이형성증으로 명명한다. 그의 사촌 중 셋도 같은 질환을 앓았다.
백작인 아버지는 기행으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여성 발레리나의 부풀린 짧은 치마를 입고 점심식사 자리에 나타나기도 했고, 말의 젖을 직접 짜서 들이켜기도 했으며, 매와 가마우지에게 성수를 먹여 천국에 보내려 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사냥과 승마에 광적으로 집착했던 이 귀족에게 말을 탈 수 없는 아들은 가문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실패작이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거의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 아들이 나중에 유명한 화가가 됐지만 아버지에게는 여전히 말을 탈 수 없는 아들일 뿐이었다. 아버지의 정서적 유기로 툴루즈-로트레크는 평생 깊은 상처를 안고 살았다. 청소년기에 쓴 일기장에는 “나는 크지도 잘생기지도 않았다”고 자신을 평가한 대목이 나온다.
◇몽마르트르 여인 그린 ‘세탁부’, 120년 뒤 232억원에 팔려
아버지가 외면한 자리를 채운 것은 어머니였다. 어릴 때부터 바깥 활동 대신 그림에 몰두할 수 있었던 것도, 당대 파리화단을 이끌던 레옹 보나와 페르낭 코르몽의 스튜디오에서 정식 미술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어머니의 오랜 보살핌과 후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코르몽의 화실이 있던 몽마르트르는 당시 카바레와 선술집, 매음굴이 뒤섞인 곳이었고 젊은 화가들에게 그 골목들은 작업실의 연장이었다. 툴루즈-로트레크 역시 동료들과 어울려 술집을 전전하는 사이 자연스럽게 거리의 여인들과 안면을 텄다. 처음에는 모델로, 이윽고 일상을 나누는 이웃으로 관계가 깊어졌다.
1894년의 앙리 드 툴루즈-로트레크. 13, 14세에 다리가 한쪽씩 부러진 뒤 성장이 멈춰버려 평생 152㎝의 키로 살았다. 친한 사진작가 폴 세스코가 촬영했다.
19세기 파리에서 세탁부는 도시의 힘겹고 위험한 직업 중 하나였다. 습한 작업장에서 무거운 빨래를 나르고, 뜨거운 다리미와 증기·화학약품에 하루종일 노출되는 일상은 쉽게 결핵과 기관지염을 불러왔다. 당시 파리에는 수만 명의 세탁부가 있었고 임금은 형편없이 낮았다. 그런 이유로 많은 세탁부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부업으로 매춘에 의지해야 했다. 때문에 세탁부를 바라보는 행인의 시선에는 성적 대상화가 뒤섞여 있었고 높은 습도로 인해 헐렁한 옷을 입을 수밖에 없던 차림까지 도덕적으로 의심받았다. 고댕 역시 세탁소에서 일하며 모델 일을 병행했고 훗날에는 툴루즈-로트레크의 매춘부 연작에도 등장하게 된다.
하지만 툴루즈-로트레크는 ‘세탁부’에 대한 도덕적 논평을 철저히 배제했다. 연민도 비난도 이상화도 거부했다. “나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그린다. 논평하지 않는다. 기록할 뿐이다.” 그가 남긴 이 말은 ‘세탁부’의 정수기도 하다. 그저 한 여인이 창밖을 바라보는 찰나를 포착했을 뿐인데 그 순간 안에는 19세기 파리 여성노동자의 삶 전체가 농축돼 있다. 먼 훗날인 2005년 미국 뉴욕 크리스티경매에서 ‘세탁부’는 2240만달러(당시 약 232억원)에 낙찰되며 툴루즈-로트레크 작품 중 최고가를 기록했다. 120년이 지나서야 세상은 이 ‘하찮은’ 세탁부의 얼굴이 지닌 가치를 비로소 인정한 것이다.
앙리 드 툴루즈-로트레크의 ‘의료검진’(1894). 서른 살부터 사창가에 아예 들어가 살면서 여인들과 공유했던 일상의 풍경 중 하나다. 매춘부들의 정기검진 장면을 묘사했으나 성적 착취 대상이 아닌 제 삶을 사는 여인의 기록으로 그렸다. 길고 얇은 붓질로 캔버스에 상당 부분을 드러낸 작업은 ‘색채물감으로 그린 드로잉’이란 평가를 받았다. 나무에 붙인 카드보드지에 유채, 83.5×61.4㎝. 내셔널갤러리 오브 아트 소장(미국 워싱턴DC).
◇사회서 배척당한 여인들과 장애로 배척당한 화가의 유대감
그림에는 두 여인이 속치마를 걷어 올린 채 줄을 서 있다. 금발의 나이 든 여인은 체념한 듯 눈을 내리깔고 품에 옷을 모아 쥐며 남은 존엄을 지키려 한다. 붉은 머리의 젊은 여인은 보다 당당하게 날카로운 시선을 던지는 중이다. 덕분에 이 작품의 핵심은 벗겨진 육체가 아니라 그 눈빛이 됐다. 바로 이 장면을 툴루즈-로트레크는 성적 착취의 대상이 아닌 삶을 살아가고 있는 여인의 기록으로 그린 것이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 같은 만들어진 아름다움을 그리기보다, 화려한 옷으로 치장하거나 이상적인 육체를 가진 모델을 그리기보다는 말이다. 화가 앞에서 매혹적인 포즈를 취하지 않는 여인, 위선 없이 묵묵히 제 삶을 사는 여인을 그린 것이다.
툴루즈-로트레크가 즐겨 그린 가수 이베트 길베르는 자신의 회고록에 “난 귀족의 살롱보다 사창가의 거실에서 더 많은 품격을 발견한다”는 화가의 말을 남겨뒀다. 툴루즈-로트레크는 “여인들의 웃음 뒤에 숨은 쓴맛을 난 누구보다 잘 안다”고도 했고, “화장을 떡칠한 창녀가 아니라 우리가 함께 살아가야 할 사악한 사회의 상처”라고도 했다. 사회로부터 배척당한 여인들 사이에서 육체적인 기형으로 배척당한 화가는 비로소 동등한 존재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앙리 드 툴루즈-로트레크의 ‘물랭 가의 살롱’(1894). 프랑스 파리 몽마르트르에서 물랭루주의 포스터를 비롯해 술집·매음굴·뮤직홀 등을 소재로 왕성하게 작업하던 때에 그렸다. 특히 날카롭고 박력 있는 소묘가 유명한데, 그 소묘의 힘에 바탕을 둔 유화는 어둡지만 강렬하고, 부드럽지만 각이 잡힌 특유의 화풍을 입고 있다. 카드보드지에 유채, 111.5×132.5㎝, 툴루즈-로트레크미술관(프랑스 알비) 소장.
△이윤희 미술평론가는…
1970년생. 대학을 다니던 20대 어느 겨울, 유럽행 비행기에 오른 것이 인생에 미술을 들인 결정적 계기가 됐다. 어느 미술관에서 마주친 렘브란트의 ‘어머니 초상’이란 작품이 발을 붙들었다. 뭔가 꿈틀거리는 게 올라왔다. 세상을 감동시킨 수많은 작품이 품은 이야기를 가지고 싶다는 열망과 함께였다. 이화여대 독문학과를 졸업한 뒤 동대학원 미술사학과에 진학해 본격적으로 미술의 역사, 미술의 말을 공부했다. 이후 ‘공간’ 지 미술기자로 출발해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실장, 아트센터 화이트블럭 학예실장, 청주시립미술관 학예실장, 수원시립미술관 학예과장 등을 거쳤고, 지금은 이화여대·추계예대 등에서 미술이론을 강의하며 오래전 렘브란트의 감동을 넓혀가고 있다. 번역서로 ‘그림자의 짧은 역사’(2006), ‘포토몽타주’(2003), ‘바디스케이프’(1999)가 있으며 저서로는 ‘불편한 시선: 여성의 눈으로 파헤치는 그림 속 불편한 진실’(2022), ‘꿈꾸는 방: 여성과 공간의 미술사’(2023)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