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소설 ‘처단’을 펴낸 정보라(50) 작가는 “권리는 ‘제로섬 게임’(누군가 얻으면 누군가 잃는 구조)이 아니며, 누군가의 인권을 지키는 일이 결국 미래의 나를 지키는 일”이라며 이같이 밝혔다.
소설집 ‘저주토끼’로 2022년 부커상과 2023년 전미도서상, ‘너의 유토피아’로 2025년 필립 K.딕 상 최종 후보에 오른 정보라가 국가폭력을 소재로 한 신작으로 돌아왔다. ‘처단’은 2024년 12월 3일 비상계엄 선포 이후를 배경으로, 국가 권력이 일상에 개입하는 순간 개인의 삶이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그린 작품이다.
31일 서울 강남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정 작가는 “국가폭력은 쉽게 사라지지 않고 후손과 가족에게 상흔으로 남는다”면서 “아픈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이 비극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힘주어 말했다.
정보라 작가(사진=상상스퀘어).
‘처단(결단을 내려 처치하거나 처분함)’은 일상에서 흔히 쓰이는 단어는 아니지만, 비상계엄 이후 강한 인상을 남긴 말이 됐다. 이번 소설의 제목이 큰 고민 없이 정해진 이유이기도 하다. 정 작가는 남편의 수술과 입원을 앞두고 계엄 소식을 접했고, 당시 느낀 불안과 공포를 계기로 이번 소설을 쓰게 됐다고 한다.
정 작가는 “제목은 창작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포고령(계엄 상황에서 국가가 국민에게 알리는 공식 명령문)에서 반복되던 단어를 가져온 것”이라며 “집필 의도를 명확히 드러내기 위해 ‘처단’이라는 제목을 붙였다”고 설명했다.
소설이 그려내는 비상계엄의 밤은 우리가 몇 해 전 직접 겪은 현실과는 결이 다르다. 작품 속에서 군인들은 병원과 지하철 역사, 감옥 등을 오가며 무차별적으로 총을 난사하고, 수많은 시신이 군용 트럭에 실려 나간다.
호러와 SF를 넘나드는 정 작가의 상상력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국가폭력으로 죽은 이들은 혼령이 되어 다시 일어서고, 하나의 방향을 향해 천천히 움직인다. 이 같은 장면은 국가폭력의 상처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금 일깨운다.
그는 “대구 코발트 광산 학살 사건, 광주 교도소 유해 발굴처럼 과거 국가폭력의 흔적이 뒤늦게 드러난 사례들이 있다”며 “말할 수 없던 진실이 괴담의 형태로 남아 있다가 수십 년 뒤에야 밝혀진 것”이라고 짚었다. 이어 “원한이 맺힌 존재들이 그 원한을 향해 나아가는 설정을 통해 기억과 연대의 문제를 환기하고자 했다”고 덧붙였다.
정 작가는 ‘데모하는 작가’라는 별칭이 붙을 만큼 꾸준히 투쟁의 현장을 지켜왔다. “많은 경우, 화가 나서 글을 쓴다”는 그의 말처럼 현실의 부조리와 폭력에 대한 문제의식이 작품의 출발점이다. 집회와 시위에서 체득한 경험은 여성·장애인·성소수자 등 사회적 약자의 서사로 확장된다.
SF·판타지·호러의 상상력을 통해 현실을 비틀어 드러내는 방식이다. 이번 소설에서도 레즈비언 부부와 이주노동자가 등장한다. 정 작가는 “사회적 약자의 권리는 결국 모두의 삶과 연결돼 있으며, 이들의 권리가 보장되는 사회가 곧 모두를 위한 사회”라고 강조했다.
전 세계적인 K컬처 확산과 함께 한국 문학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세계 문단의 주목을 받아온 그는 K문학이 더욱 비상하기 위한 과제로 전방위적인 투자의 필요성을 꼽았다. 정 작가는 “드라마나 영화, 음악 등 모든 문화가 서로 연결돼있는 만큼 웹소설·웹툰 같은 대중 장르까지 폭넓게 지원이 이뤄져야 한다”며 “문화는 당장 성과가 보이지 않더라도 장기적인 관점에서 꾸준히 투자해야 결국 결실을 맺는다”고 부연했다.
정 작가는 연세대 인문학부를 졸업하고 미국 예일대에서 러시아·동유럽 지역학 석사를, 인디애나대에서 슬라브 문학 박사를 취득했다. 집필 외에도 러시아어 등 슬라브어권 SF·판타지 문학을 번역하며 활동 영역을 넓혀왔다. 그는 “현재도 번역 작업을 진행 중”이라며 “차기작은 내 마음의 고향인 ‘도시괴담’으로 독자들과 다시 만나게 될 것 같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