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년 고전의 반란, 남원 춘향제 ‘리부트’

생활/문화

이데일리,

2026년 4월 01일, 오전 09:05

[이데일리 강경록 여행전문기자] 1931년, 일제강점기 칠흑 같던 시절 남원 사람들은 춘향의 정절을 기리며 제를 올렸다. 그것이 대한민국 축제의 효시가 된 ‘춘향제’의 시작이다. 그로부터 96년. 강산이 아홉 번 넘게 바뀐 2026년의 봄,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만난 춘향은 더 이상 가마 뒤에 숨은 수줍은 소녀가 아니었다.

31일 열린 남원 춘향제 프레스데이


31일 오전, 웨스틴 조선 서울 호텔에서 열린 ‘제96회 춘향제(4월30~5월 6일)’ 프레스데이는 문화적 선전포고였다. 현장에는 명창의 깊은 울림 위로 현대적인 비트가 얹어졌고, 한복은 런웨이 위의 패션으로 부활했다. “박제된 춘향으로 100년을 버틸 것인가, 아니면 살아있는 춘향으로 미래를 열 것인가.” 남원이 던진 질문은 명확했다.

이번 축제의 가장 파격적인 지점은 ‘시각적 언어’의 교체다. 남원은 전 세계가 열광하는 ‘한복 입은 서양 동화’의 주인공, 흑요석 작가와 손을 잡았다. 낡은 민화 속의 인물이 아니라 화려하고 섬세한 일러스트로 재탄생한 춘향은 젊은 세대에게 ‘덕질(팬덤 활동)’하고 싶은 매력적인 아이콘으로 다가간다.

이는 단순히 그림 한 장의 문제가 아니다. 판소리에 랩을 섞고, 광한루원의 고즈넉한 풍경에 디지털 미디어 아트를 덧입히는 시도들은 모두 ‘전통의 문법’을 ‘오늘의 언어’로 번역하려는 필사적인 노력이다. 전통은 원형을 고집할 때가 아니라, 지금의 대중과 호흡할 때 비로소 생명력을 얻는다는 통찰이 읽히는 대목이다.

지금 대한민국 지방 축제들이 처한 현실은 냉혹하다. 전국 어디를 가나 비슷한 먹거리 체계와 ‘한 번 보고 떠나는’ 당일치기 관광으로는 지역 경제의 숨통을 틔울 수 없다. 남원은 이번 춘향제를 기점으로 축제의 체질을 ‘산업’으로 완전히 바꾼다는 전략이다.

31일 열린 남원 춘향제 프레스데이


핵심 키워드는 ‘체류’다. 남원시는 광한루원 담장 너머의 고택들을 숙소로 개방하고, 밤이 되면 요천변을 수천 개의 등불로 수놓는 ‘야간 경관’에 사활을 걸었다. 춘향제 기간 동안 운영되는 ‘K-풍류 패키지’는 숙박과 공연, 미식을 하나로 묶어 여행객이 남원의 공기 속에 온전히 하루를 묻게 만든다.

현장에서 만난 한 인플루언서는 “지방 축제가 단순히 사람을 모으는 ‘인원 동원’의 강박에서 벗어나, 얼마나 매력적인 ‘소비 플랫폼’을 제공하느냐로 경쟁의 판이 바뀌고 있음을 남원이 보여주고 있다”고 평했다.

이날 브리핑에서 최경식 남원시장은 ‘춘향’을 정의하며 ‘산업’이라는 단어를 수차례 언급했다. 96년이라는 압도적인 서사를 가진 남원이기에 가능한 자신감이었다.

최 시장은 “춘향은 박제된 고전이 아닙니다. 남원이 가진 가장 강력한 문화 자산이자, 글로벌 시장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최고의 K-콘텐츠”라고 정의하며, “올해 춘향제는 전통의 권위에 기대어 사람을 모으는 데 그치지 않고, 여행객들이 남원에 머물며 소비하고 다시 찾게 만드는 ‘산업적 전환점’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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