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어떤 ‘감정의 가치’를 경험하고 있나[정덕현의 끄덕끄덕]

생활/문화

이데일리,

2026년 4월 09일, 오전 05:00

[정덕현 문화평론가] 영화 ‘센티멘탈 밸류’를 보러 광화문에 있는 예술영화관 씨네큐브에 갔다. 제78회 칸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받은 작품인데 동네 멀티플렉스에서는 볼 길이 없어서다. 발품을 팔아 광화문까지 모여 함께 보는 영화여서인지 분위기 자체가 달랐다. 그저 동네 멀티플렉스에서 팝콘을 고르듯 사서 소비하는 영화가 아니라 먼 길을 찾아와서라도 보겠다는 마음 때문일까. 그걸 함께하는 관객들 간에 묘한 동질감 같은 게 느껴졌다. 비록 몇 시간 동안이지만 한 공간에서 함께 웃고 느끼고 눈물 흘리는 시간. 그것은 마치 정서적 공감을 함께하는 ‘집’ 같았다.

뜬금없이 예술영화관에서의 영화 관람에 ‘집’ 운운하는 것은 ‘센티멘탈 밸류’라는 작품이 영화에 대한 영화이면서 또한 집에 대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현재 연극배우가 된 노라(레나테 레인스베 분)가 어린 시절부터 살아왔던 집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어려서 노라는 과제로 집의 관점이 돼 글을 쓴 적이 있는데 사물을 마치 인격을 가진 존재처럼 표현해 선생님에게도 또 아버지 구스타브(스텔란 스카스가드 분)에게도 칭찬을 받았다. 사물에도 인격을 부여해 몰입할 정도로 노라에게는 일찍부터 배우의 기질이 있었던 듯 보이지만 사실 그녀가 배우가 된 데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어려서 자신과 여동생 아그네스(잉아 입스도테르 릴레오스 분)를 버리고 집을 떠난 아버지에 대한 분노와 원망이 그녀를 망가뜨렸다. 심지어 자살 시도까지 했던 노라를 겨우 숨 쉴 수 있게 해준 것이 배우라는 직업이었다. 무대에 오르기 전 극도의 공포증과 예민함을 보이는 노라는 막상 무대에 오르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감정을 폭발시키는 연기로 관객들의 박수를 받는다. 아버지에 대한 분노와 원망 같은,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운 감정들을 그녀는 배역을 연기하면서 ‘안전하게’ 꺼내 놓을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그래서 노라에게 연기는 폭풍우가 몰아치는 절망적인 삶 속에서도 안전함을 제공하는 ‘집’이 됐다.

하지만 상처는 노라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녀에게 깊은 상처를 준 구스타브 역시 그 집에 얽힌 상처가 있다. 7살 때 구스타브의 엄마 카린은 그를 등교시킨 후 자살했다. 카린은 당시 저항군을 돕다 나치에게 끌려가 심한 고문을 당하고 살아 돌아왔지만 끝내 버티지 못했다. 구스타브는 그 상처가 있는 집에서 가정을 꾸리고 아이들도 가졌지만 그 역시 버티지 못하고 도망치듯 집을 떠난다. 그가 절망감 속에서 찾아낸 공간은 ‘영화’라는 세계다. 구스타브의 영화에는 나치들에게 쫓기다 혼자만 살아남은 소녀(어린 아그네스가 연기했다)가 등장하는데 그것은 자신이 겪은 상처와 슬픔들을 영화를 통해 어떻게든 이해해 보려는 안간힘처럼 보인다. 노라의 집이 연기라면 구스타브에게 그건 영화다.

이처럼 노라와 구스타브는 다른 시간대에 다른 공간에서 다른 존재로 살아왔지만 상처를 겪고 절망했으며 그 절망 속에서도 살아가기 위해 예술이라는 세계에 몸담고 있다는 점에서 닮았다. 하지만 예술의 영역 바깥에서 딸과 아버지라는 현실에 선 그들은 소통하지 못한다. 뒤늦게 찾아와 불쑥 시나리오를 내밀며 ‘너를 위한 영화’가 될 그 작품에 주인공 역할을 맡아달라고 부탁하는 아버지와 그것이 고마우면서도 황당해 시나리오는 들춰 보지도 않고 거절하는 딸 사이에는 결코 넘기 어려운 감정의 강이 흐른다. 그들은 연기와 영화라는 각각의 집에서 그럭저럭 버텨내며 살아가고 있지만 결코 한 집(실제 집에서도 또 한 작품에서도)에 살 수 없을 것처럼 보인다.

이 넘기 어려운 감정의 강 사이를 아그네스가 연결한다. 역사학자인 그녀는 구스타브의 엄마가 나치에게 당했던 끔찍한 고문들을 문서를 찾아 읽으며 공감하려 하고 그것이 스스로 목숨을 끊을 만큼 아픈 상처였다는 걸 이해하려 한다. 그리고 우연히 아버지의 시나리오를 읽은 그녀는 거기서 노라와 닮아있는 아버지의 상처를 읽어낸다. “누구에게인지는 모르겠지만 소리를 내서 말했어요. 도와주세요. 더 이상 못하겠어요. 혼자서는 못해요. 나에겐 집이 필요해요.” 시나리오에 담긴 그 몇 줄은 아버지의 목소리, 노라의 목소리, 나아가 카린의 목소리처럼도 들린다. 모두가 똑같이 느꼈던 절망의 감정 앞에서 저마다 필요했던 집의 존재를 외치고 있었다. 아그네스가 가져와 읽게 한 아버지의 시나리오에 적힌 그 대사를 노라는 무심하게 읽어 나가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오열한다. 오래도록 골이 깊었던 감정의 강이 공감되고 연결되며 소통되는 순간이다.

결국 ‘센티멘탈 밸류’가 그리고 있는 것은 노라와 구스타브의 화해지만 그걸 매개하는 건 영화라는 예술이다. 이건 무엇을 말하는 걸까. 그건 우리가 흔히 보는 드라마나 영화 같은 작품들이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가진 저마다의 상처와 감정들을 ‘안전하게’ 묶어내 공유하고 풀어내 주는 하나하나의 ‘집’ 같은 역할을 해준다는 뜻이 아닐까. 만일 이러한 예술이 안전하게 만들어주는 집들이 없다면 이 사회가 과연 저 많은 상처와 감정들을 온전히 감당해낼 수 있을까. 씨네큐브를 나오며 잠시지만 같은 공간 같은 시간을 함께한 사람들에게서 갖게 되는 작은 유대감 같은 게 느껴졌다. 그건 잠시 같은 집에 있다 나온 것 같은 그런 기분이다. 노라와 구스타브처럼 각자의 현실에서 우리는 갈등할 수도 있다. 그러니 때론 영화나 드라마 같은 예술같이 잠시라도 ‘집’이 돼주는 시간과 공간이 있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게 아닐까. 당신에게는 어떤 집이 그런 감정의 가치를 경험하게 하는가.

영화 ‘센티멘탈 밸류’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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