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거들랑, 다정한 벚님과 발맞춰 걸으리 [여행]

생활/문화

이데일리,

2026년 4월 10일, 오전 06:01

순창읍을 가로지르는 경천 전경. 봄빛이 내려앉은 물길과 벚꽃 산책로가 도심의 새로운 풍경축이 되고 있다.
[이데일리 강경록 여행전문기자] 누구에게나 문득 세상의 모든 소음을 뒤로하고 어디론가 숨어들고 싶은 순간이 있다. 끝없이 울리는 휴대폰 알람을 끄고, 쉼 없이 돌아가는 속도의 세상에서 잠시 내려와 발길 닿는 대로 무작정 걷고 싶은 그런 날. 전북 순창의 읍내를 가로지르는 두 갈래 물길인 ‘경천’과 ‘양지천’은 바로 그런 이들을 위해 자연이 미리 정성껏 준비해 둔 다정한 안식처와 같다. 지금 이곳에 서면 머리 위로는 하얗게 만개한 벚꽃이 폭포처럼 흩날리고, 발치에서는 낮게 깔린 연분홍 꽃잔디가 비단 융단처럼 몽글몽글 피어오른다. 뺨을 스치는 꽃잎의 부드러운 감촉과 귓가를 간지럽히는 맑은 물소리에 온몸의 감각을 맡기다 보면 어느새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마음의 줄이 느슨하게 풀리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상공에서 내려다본 순창 경천 수변길. 정비된 하천과 산책로, 벚꽃길이 읍내 생활권과 맞물려 있다.
◇천덕꾸러기 개울에서 고을의 ‘심장’으로

순창읍은 본래 두 물줄기가 평지 위에서 몸을 섞는 산간분지 형태다. 광덕산에서 발원한 경천은 고을의 뼈대를 이루고 인계면에서 시작된 양지천은 기름진 들을 적시며 사람 사는 터를 열었다. 예부터 순창 사람들에게 이 두 하천은 농사를 짓게 하고 길을 열어준 ‘생명줄’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산업화와 도시화의 그늘은 이 물길을 차갑게 식혔다. 한때 경천과 양지천은 읍내의 ‘골칫거리’이자 천덕꾸러기였다. 사람들은 하천에 등을 돌린 채 집을 지었을 정도. 자연스레 갈대만 무성해진 둔치에는 쓰레기만이 가득 쌓였다. 그래서일까. 해마다 여름이면 악취가 코를 찔렀고, 비만 오면 범람을 걱정해야 했던 딱딱한 콘크리트 제방은 주민들 사이를 가로막는 단절의 벽이었다. “밤이면 무서워서 근처에도 못 가던 곳”이 불과 몇 년 전 순창 하천의 민낯이었다.

이 천덕꾸러기 개울이 이제는 고을 전체를 환하게 밝히는 주인공이 됐다.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다는 ‘경천동지(驚天動地)’라는 말이 있지만, 요즘 주민들은 이 놀라운 반전을 ‘경천양지’라 바꿔 부른다. 순창군이 하천의 숨통을 틔우고 꽃을 심자 죽어가던 물길에 맥박이 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삭막했던 변두리가 다시금 고을의 ‘앞마당’이 되자 주민들 삶에도 비로소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길에서 만난 주민 김순자(68) 씨는 “예전엔 하천이 그저 지저분한 뒷골목이었는데 이제는 매일 아침 수선화와 꽃잔디 향기에 눈을 뜬다”며 “물길이 살아나니 도시 전체가 다시 숨을 쉬는 것 같다”고 웃었다.

유유히 흐르는 양지천 너머로 하얀 벚꽃과 노란 수선화, 그리고 분홍빛 꽃잔디에 둘러싸인 정자가 물에 비쳐 고요한 풍경을 이루고 있다.
양지천 강둑을 따라 길게 뻗은 벚꽃 터널과 수변에 깔린 노란 수선화와 분홍 꽃잔디가 어우러져 주민들과 나그네를 반긴다.
◇벚꽃 구름 아래 핀 분홍빛 자수(刺繡)

물길을 따라 걷다 보면 시선은 자연스레 하천 옆 남산 기슭에 자리한 ‘귀래정’(歸來亭)으로 향한다. 조선의 선비 신말주가 벼슬을 버리고 내려와 지은 정자다.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자 마음을 다치고 한양을 떠난 그가 안착한 곳이 바로 이 물가였다. 당시 그에게 이 물길은 세상 풍파를 피해 잠시 몸을 숨기는 마지막 ‘휴식처’였다.

흥미로운 것은 600년 전 한 선비의 고독이 깃든 이 자리가 오늘날 가장 찬란한 위로의 공간으로 변했다는 점이다. 정자 마루에 걸터앉아 벚꽃 잎이 경천의 맑은 물 위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 있으면 복잡했던 머릿속이 씻겨 내려가는 듯하다. 선비가 세상의 소음을 피해 누렸던 고요한 평화는 이제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일상의 권리가 된 것이다.

순창 금산여관은 옛집을 개조한 감성적인 공간이다. 순창 골목 안에 숨은 작은 쉼표 같은 장소다.
선비의 기개가 흐르는 길 끝에는 나그네의 고단함을 덮어주는 금산여관이 있다. 1930년대 지어진 고택을 다듬어 여행자들의 쉼터로 만든 이곳은 순창의 시간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정갈한 마당에 앉아 수변 산책로에서 얻은 여운을 곱씹다 보면, 왜 순창이 ‘머무는 여행’에 이토록 어울리는 곳인지 실감한다.

지금 순창의 봄은 시선이 머무는 곳마다 빈틈이 없다. 제방에는 70만 본의 꽃잔디와 수선화가 융단처럼 깔려 있고 그 위로는 하얀 벚꽃 터널이 아득하게 이어진다. 바람이 불면 하얀 벚꽃 잎이 분홍색 꽃잔디 위로 내려앉았다. 마치 분홍색 비단 위에 하얀 수를 놓는 듯한 그 풍경에 여행자의 발걸음은 절로 멈췄다.

특히 낮에는 양지천의 화사함에 취해 걷는 것이 좋다. 햇살을 머금은 꽃잔디의 색깔은 눈이 시릴 정도로 선명하다. 벚꽃이 지고 나면 그 자리를 연두색 아기 잎들이 채울 것이고 꽃잔디는 4월 내내 더 짙은 향기를 뿜어내며 자리를 지킬 것이다. 해가 기울 무렵엔 경천으로 자리를 옮겨야 한다. 강물을 금빛으로 물들일 때 하나둘 켜지는 야간 조명과 시원하게 솟구치는 음악분수는 순창의 밤을 낮보다 아름답게 만든다.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순창 순대국밥. 콩나물과 부추를 올린 뜨거운 국물에서 장터 음식의 온기가 전해진다.
◇여행 수첩

▶가는 길: 내비게이션에 ‘순창 귀래정’ 혹은 ‘순창 양지천’을 검색하면 물길 여행의 시작점에 닿는다. 읍내 곳곳에 공영주차장이 마련되어 있어 주차가 편리하며, 순창공용버스터미널에서 도보로 10~15분이면 수변 산책로에 진입할 수 있다.

▶주변 먹거리: 아침 식사로는 순창 재래시장 내 순대국밥을, 점심으로는 시장 골목의 노포 창림국수를 추천한다. 저녁엔 군청 인근 순창 한정식 거리가 제격이다.

▶주변 볼거리: 순창초등학교 안의 순창객사(淳昌客舍)와 인근 순창향교도 함께 둘러보기 좋다. 강천산 군립공원은 물길 여행의 연장선으로 훌륭한 선택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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