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히 모델 주제에 붓을 들어?" [화폭역정 6]

생활/문화

이데일리,

2026년 4월 10일, 오전 07:40

수잔 발라동의 ‘푸른 방’(1923). 침대에 비스듬하게 기댄 여인. 전통적으로 서양화에 자주 등장하는 여성 누드화의 포즈다. 하지만 그림 속 여인은 이제껏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줄무늬 파자마 바지에 분홍 캐미솔을 입고 담배까지 물었다. 발치에 던져둔 책도 눈길을 끈다. 담배나 책은 당시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졌다. 화가에게 그림을 주문하고 그 그림을 즐겨온 남성의 시선을 빼버리는 것으로 발라동은 관습이 요구하는 여성성을 대놓고 거부했다. 후대 여성 예술가들에게 크게 영향을 미친 작품이다. 캔버스에 유채, 90×116㎝. 퐁피두센터 국립현대미술관(프랑스 파리) 소장.
여기, 세상이 열광하는 그림이 있습니다. 누구나 찬사를 아끼지 않는 걸작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아름다운 작품, 화려한 명성 뒤에 숨은 화가는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지독하게 어긋난 운명, 고단하고 허무한 삶이었노라고 말입니다. 이데일리는 오랜 시간 ‘그림이 하는 말’을 들어온 이윤희 미술평론가와 함께 세계미술사에 굵직한 획을 그은 천재화가들의 인생역정을 더듬습니다. 단순한 일대기를 넘어섭니다. 뜨거운 예술혼이 맞닥뜨린 차가운 현실, 그 쓸쓸한 생이 한사코 밀어냈을 결정적 장면을 엿봅니다. 삶이 묻고 그림이 답합니다. 캔버스에 굽이치던 화가의 인생길 ‘화폭역정’입니다.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께 다가섭니다. <편집자>


[이윤희 미술평론가] 2025년 1월 프랑스 파리 퐁피두센터에서 수잔 발라동(1865∼1938)의 대규모 회고전이 열렸다. 발라동이 세상을 떠난 이후 87년, 앞선 회고전으로부터 58년 만의 일이었다. 동시대 화가들이 사후에도 반복적으로 전시되고 세계에 알려지는 동안 발라동은 미술사에서 ‘기타 등등의 화가’에 머물러 있었다. 이 전시는 그 오랜 침묵을 깨뜨렸다.

화가 발라동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모습을 기억하는 이들은 있을 것이다. 르누아르가 그린 ‘부지발의 무도회’(1883)에서의 모델, 파트너 어깨에 살짝 기대어 볼이 상기되고 입가에 미소가 번진 이 여성이 발라동이다. 화면 전체에 깃든 생의 환희 속에 발라동의 얼굴이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 그런데 같은 해,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발라동이 자신을 그린 ‘자화상’(1883)을 보면 같은 사람의 얼굴이 맞나 싶을 정도로 전혀 다른 표정을 볼 수 있다. 이 작은 그림에는 르누아르 작품에서 보이던 즐거움이나 수줍음을 찾아볼 수 없다. 자화상 속 얼굴은 창백하고 시선은 날카로우며 입가에서는 미소가 사라졌다. 같은 해에 그려진 두 그림 사이에 발라동의 삐걱거리는 삶이 있었다.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부지발의 무도회’(1883). 뺨을 불그스름하게 물들이고 한 남성과 춤을 추고 있는 여인이 수잔 발라동이다. 발라동은 19세기 후반 프랑스 파리 몽마르트르 화가들의 그림에 가장 많이 등장한 모델로 꼽힌다. 특히 르누아르 작품에서 자주 등장했는데 그림 속 발라동은 늘 예쁜 드레스를 입고 수줍은 얼굴로 세상 가장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다. 캔버스에 유채, 181.9×98.1㎝. 보스턴미술관(미국 메사추세츠) 소장.
발라동은 1865년 프랑스 시골마을 베신에서 미혼모 세탁부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사생아 출산의 치욕을 피해 다섯 살 난 딸을 데리고 파리로 상경했고, 뭘 해도 가난을 면할 수 없었다. 열한 살에 학교를 그만둔 발라동은 모자 공방, 장례용 화환 공장, 채소 행상, 웨이트리스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삶에 지지대가 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아야 하는 고된 삶만이 주어졌다.

열다섯 살에 서커스 곡예사가 됐지만 공중그네에서 추락하는 사고로 곡예사의 꿈은 좌절됐다. 남은 것은 부상당한 몸뿐이어서 화가들의 모델이 됐다. 르누아르를 비롯해 샤반, 툴루즈-로트레크 등을 거치며 당대 거장들이 발라동을 모델로 썼다. 모델이란 대개 벌거벗은 채 화가가 원하는 포즈를 장시간 취해야 하는 직업이었고, 당시 사회적 위치는 매춘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모델로 나설 때 발라동은 다른 어떤 일을 할 때보다 눈이 반짝였다. 잠시 쉬는 시간에는 가운을 둘러쓰고 화가들이 붓질하는 것을 어깨너머로 지켜봤다. 색을 섞는 법, 선을 긋는 법, 빛을 표현하는 법을 눈에 담은 발라동은 이 마법과 같은 예술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발라동의 유일한 미술학교는, 자신이 모델을 서는 바로 그 현장이었다.

수잔 발라동의 ‘자화상’(1883). 열여덟 살의 발라동이 자신을 그렸다. 이 해에 발라동은 아들 모리스 위트릴로를 낳고 미혼모가 됐다. 원체 꾸미는 데 관심이 없던 발라동은 흔한 액세서리도 없이 푸석한 얼굴 그대로의 자신을 화면에 옮겨놨다. 당시 여성의 매력을 과장해 ‘아름다운 여인’만을 그린 남성 화가들의 붓질과는 다른 지향이다. 종이에 목탄과 파스텔, 43.3×30.5㎝. 퐁피두센터 국립현대미술관(프랑스 파리) 소장.
◇발라동의 컬렉터 된 드가…마네·고갱 작품과 나란히 걸

르누아르는 어느 날 발라동이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을 봤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모델이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아무도 기대치 않는 일이었다. 그러나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발라동이 에드가 드가(1843∼1917)에게 드로잉 포트폴리오를 들고 찾아갔을 때 드가는 창가에서 한 장 한 장 넘겨본 뒤 이렇게 말했다. “그렇네요, 사실이에요. 당신은 우리 중 하나입니다.”

발라동은 이 순간을 평생 잊지 못했다. 훗날 “그날 난 날개가 돋았다”고 회고했다. 은둔적이고 인간관계에 인색하며 특히 여성을 무시하기로 유명했던 드가가 한번도 정규교육을 받은 적 없는 모델의 그림을 보고 즉각 화가 동료로 인정한 것이다. 드가는 발라동을 만난 첫날 그의 드로잉을 구매했고, 자신의 식당 벽에 마네, 고갱, 들라크루아 작품이 걸린 그 옆에 걸어뒀다. 드가가 사망한 뒤 아파트에서 발견된 컬렉션에는 발라동의 드로잉 17점과 판화 3점이 포함돼 있었다.

1895년 부유한 은행가 폴 무시와의 결혼으로 발라동은 처음으로 경제적 안정을 얻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림 작업은 거의 하지 못했다. 드가는 이를 안타까워하며 신작 포트폴리오를 들고 오라고 발라동에게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이 시기 발라동에게는 아들 모리스 위트릴로(1883∼1955)의 문제가 삶의 대부분을 잠식하고 있었다. 열여덟 살에 미혼모로 낳은 아들은 조현병과 알코올 중독에 시달리며 입퇴원을 반복했다. 치료의 일환으로 발라동은 아들에게 붓을 쥐어주고 그림을 가르치기도 했는데 그 노력이 헛되지 않아 이후 위트릴로는 뛰어난 풍경화가로 성장했다.

수잔 발라동과 아들 모리스 위트릴로. 1890년경이다. 사진을 찍은 이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결혼생활은 원만하게 이어지지 못했다. 1909년 이혼한 발라동은 얼마 뒤 아들의 친구이자 자신보다 스물한 살이나 어린 화가 앙드레 우터(1886∼1948)와 사랑에 빠진다. 이 나이 차이는 당시 파리 사람들에게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한 집에서 아들 위트릴로를 돌보면서 아들의 친구 우터와 동거하는 그 자체로 ‘저주받은 삼위일체’라 불렸다. 그럼에도 발라동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그림을 팔아 생계를 꾸렸고, 구매자든 비평가든 그 누구 앞에서도 당당했다. 그런데 이 당당함이 되레 앞길을 좁히기도 했다.

◇전통적 누드화 전복…헐렁한 파자마 입은 ‘아름답지 않은’ 여인

발라동의 그림에는 당대 여성 예술가에게 기대되던 이른바 ‘여성다움’, 그러니까 부드러운 색채와 우아한 붓질, 혹은 가정적인 주제 등을 찾아볼 수 없었다. 만년의 대표작 ‘푸른 방’(1923)에는 당당한 체구의 여인이 침대에 비스듬히 기댄 채 누워 있다. 구도만 보면 서양 회화사에서 끊임없이 반복된 여성 누드의 포즈지만 이 여인은 벌거벗지 않았다. 줄무늬 파자마 바지에 분홍 캐미솔을 입고, 입술에는 담배를 물었으며, 발치에는 읽다 만 책이 쌓여 있다. 전통적 누드화에서 여성의 몸은 보는 자, 대개 그림을 주문한 남성의 시선을 위해 존재했다. 그 자리에 발라동은 누구의 시선도 신경 쓰지 않고, 그다지 아름답지도 않은 여인을 대신 들인 것이다. 발라동의 그림은 전체적으로 ‘여성 답지 않다’는 평가를 받았는데, 정확히 그 ‘여성 답지 않음’이야말로 발라동이 미술사에 남긴 가장 본질적인 기여라고 할 수 있다. 관습이 요구하는 여성성을 거부한 자리에 여성화가가 여성을 바라보는 진실의 세계가 들어섰기 때문이다.

1938년 4월, 72세의 발라동은 몽마르트르의 작업실에서 꽃을 그리다가 붓을 쥔 채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이젤 앞에서의 죽음이었다. 장례식에는 피카소, 드랭, 브라크 등 당대 유명화가들이 참석했다. 하지만 그들의 이름이 점차 드높아간 것과 달리 발라동의 이름은 서서히 사라졌다. 발라동 스스로도 자신의 사후가 이렇게 될 것이라고 예감하고 있었다. 생을 마감하기 1년 전, 작가 프랑시스 카르코(1886∼1958)에게 발라동은 이렇게 말했다. “내 작업은 끝났어. 그것이 내게 주는 유일한 만족은 내가 결코 굴복하지 않았다는 것, 내가 믿었던 어떤 것도 배반하지 않았다는 거야. 언젠가 누군가 내게 정의를 베풀어 준다면 당신은 그걸(내 작품을) 보게 되겠지.”

수잔 발라동의 ‘가족초상화’(1912). 발라동이 자신보다 스물한 살이나 어린 아들 친구와 함께 살기 시작한 이후 형성된, 결코 평범하지 않은 가족의 모습을 그렸다. 위부터 젊은 연인 앙드레 우터, 발라동 자신과 어머니 마들렌 발라동, 아들 모리스 위트릴로다. 그림을 그릴 당시로선 발라동의 삶을 형성한 네 개의 기둥과 같은 사람들이었다. 캔버스에 유채, 98×73.5㎝. 오르세미술관(프랑스 파리) 소장.
그 ‘언젠가’가 왔다. 리모델링으로 2030년까지 문을 닫게 된 퐁피두센터의 2025년 마지막 대규모 전시로 발라동이 선택됐던 것이다. 르누아르의 그림 속에서 즐겁게 춤추던 그 여인이, 가운을 둘러쓰고 화가의 붓질을 어깨너머로 훔쳐보던 그 모델이 돌아왔다. 자신의 인생을 두고 ‘결코 굴복하지 않았다’고 말한 발라동의 작품 200여 점은 가족의 초상에서 누드로, 누드에서 풍경으로, 풍경에서 정물로, 어느 하나의 소재에 안주하지 않았고 한 가지 화풍으로 기울지도 않았다. 드가에게서 배운 선은 고갱의 색채를 만나 변형됐고, 후기로 갈수록 그만의 굵고 단호한 윤곽선이 화면을 지배했다. 어떤 유파에도 귀속되기를 거부한 이 끊임없는 변화는, 그림의 세계에서조차 안온함에 머무르지지 않았음을 말한다. 사망한 지 거의 한 세기 만에 발라동은 다시 우뚝 섰다. 세상은 발라동을 굴복시키지 못했다.

△이윤희 미술평론가는…

1970년생. 대학을 다니던 20대 어느 겨울, 유럽행 비행기에 오른 것이 인생에 미술을 들인 결정적 계기가 됐다. 어느 미술관에서 마주친 렘브란트의 ‘어머니 초상’이란 작품이 발을 붙들었다. 뭔가 꿈틀거리는 게 올라왔다. 세상을 감동시킨 수많은 작품이 품은 이야기를 가지고 싶다는 열망과 함께였다. 이화여대 독문학과를 졸업한 뒤 동대학원 미술사학과에 진학해 본격적으로 미술의 역사, 미술의 말을 공부했다. 이후 ‘공간’ 지 미술기자로 출발해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실장, 아트센터 화이트블럭 학예실장, 청주시립미술관 학예실장, 수원시립미술관 학예과장 등을 거쳤고, 지금은 이화여대·추계예대 등에서 미술이론을 강의하며 오래전 렘브란트의 감동을 넓혀가고 있다. 번역서로 ‘그림자의 짧은 역사’(2006), ‘포토몽타주’(2003), ‘바디스케이프’(1999)가 있으며 저서로는 ‘불편한 시선: 여성의 눈으로 파헤치는 그림 속 불편한 진실’(2022), ‘꿈꾸는 방: 여성과 공간의 미술사’(2023)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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